나에게도 이런 인연(因緣)이
민효선의 찻집에서
바람이 불고 기온이 급강하했다. 오늘 따라 김도운 선생님의 강의가 30분이나 늦게 끝났다. 지난 시간 결강한 것에 대한 보충강의 때문이다. 외투 깃을 세우고 중구청 역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종종 걸음으로 점점 빨라졌다. 역에서 집으로 가는 그 길이 오늘은 다르다
분명 조금은 다르다
매일 매일 수도 없이 다녔던 너무나도 익숙한 그 길에 무언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내 걸음을 빠르게 재촉하고 있다
환하게 밝혀진 거리의 간판 글조차 보지 못한 채, 뭔지 모를 설렘을 안고 그 길을 걸어왔다
올 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버린 시간들이 얼마던가? 요즘 들어 너무도 내 자신이 한심스럽고 무얼 해야 하는지 고민 중이었는데...
그래서 그랬던가. 답답한 마음속에 무언가 모를 희망이, 설렘이.. 내 마음 한쪽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났나? 선생님으로부터 톡이 왔다. 나와 함께 인문학을 배우는 선생님이시다. 손 내밀었을 때 잡고 따라와 줘서 고맙다고, 하고 싶은 일이 뭐 있느냐고도 하셨다?
하고 싶은 일?
그런데 난.
그 하고 싶은 일이 무어냐 물으시니 난감했다.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나로서는 이렇다하게 하고 싶은 일이 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답을 날렸다.
“잘하는 것도 없고, 뭘 해야 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있어요. 요즘 이것이 제 인생의 숙제입니다 ” 라고.
그렇다. 난 요즘 지독히도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난 뭘 해야 한단 말인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유성 온천역에서 만났다.
거의 집에 도착하셨다는 선생님은 나와의 약속을 위해 다시 버스에 오르셨다
무언가 보고 계시는 선생님, 살짝 다가가 인사를 드리니 핸드폰을 거두시며 반가이 맞아 주신다.
커피숍도 마다하시기에 유성 온천역 대합실 탁자에 앉아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80이 다 되어 가신다는 선생님은 젊은 나보다도 훨씬 바쁘게 움직이신다. 무슨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질문에는 얼굴이 화끈 거렸다.
자격증 하나 없기 때문이다.
우선 하고 싶은 것들 중에 자격증 취득을 먼저 하라 하시면서 자격증 취득 방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그러시면서 오늘 하루 일과를 일기 형식의 글로 써서 메일로 보내라며 명함을 주셨다.
그런데 나에게 글이라니... 조금은 당황했지만, 선생님께서 키워 오신 제자들의 이야기를 해주시며 격려해주신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을까? 한 번 해볼까? 그 짦은 순간에 희망을 품어보는 나 자신을 본다. 약간은 상기된 맘으로, 가슴에 약간의 꿈을 갖고 선생님과 헤어졌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했다. 제갈공명은 유비를 만나 가지고 있던 책사(策士)로서의 꿈을 펼칠 수 있었고, 장영실은 세종임금을 만나 재능을 발휘 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엘리야는 사렛다과부를 만나 목숨을 연명(延命)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인연(因緣).
나이 오십을 넘어서니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슴에 다가오는데 과연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어떻게 펼쳐질지...
좋은 인연은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관심이라는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보듬으며 하루하루 만들어가야 좋은 인연이 아닌가 싶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因)과 연(緣)은 결과를 산출하는 내적·직접적 원인으로 보고, 연은 결과의 산출을 도와주는 외적·간접적 원인이라고 보고 있는데 먼저 손을 내밀어 이끌어 주시는 선생님이 인의 역할을 해주시는 것이고 그 내민 손을 잡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내가 연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랬나?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유난히도 달랐던 것이...
나도 선생님과 그런 사람이고 싶고 앞으로도 좋은 인연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