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유혹에 끌려
창 넘어 거실 환히 햇빛이 밀려온다.
모처럼 거실 바닥 이부자리 깔고 뒹굴거릴 심산이다.
“으와. 좋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게으름인가. 푹 퍼질러 텔레비전 보며 자다 깨길 몇 차례. 창 넘어 들어온 빛이 거실 안에 한 가득. 눈 부셔 커튼을 쳐야 할 만큼 밝다.
오늘 꼼짝 않고 게으름 필요량이 빛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이다.
꿈벅꿈벅 감기는 두 눈, 마지못해 들어 올린다. ‘일어나자. 그만 일어나자’ 비몽사몽 늘어진 몸뚱이, 곧추 세우는 시간 반나절이다.
봄의 빛은 요물이다. 내 마음 흔들어 나를 벌떡 일으킨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요물, 언제나 봄의 유혹에 약한 나는 오늘도 무너져 버린다.
‘그래. 나가자. 봄의 유혹, 그냥 있을 순 없다.’
시인 양동길은
『소슬바람과 나눈 / 들큼한 이야기 / 곰살갑게/ 바다로 나르는 / 강물이고 싶어라』고 신성리 갈대밭을 찾은 소감을 노래했다. 그럴 것이다. 남정네들은 가을의 정취에 끌리고 여인네들은 봄의 따스한 햇볕에 끌리게 되는 게 자연의 이치 아니던가?
“봄 처녀 제 오시네” 흥얼흥얼.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다. “봄 아줌마 제 오시네, 새 풀 옷 을 입으셨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채양이 넒은 모자를 눌러쓴다. 감지 않은 머리, 모자 하나로 나의 패선은 완성된다. 봄 아줌만 오늘 하루 게으를 권리를 요물에게 빼앗겨버린다.
흥얼흥얼 계속되는 봄 처녀 타령을 입에 달고 집을 나선다.
따듯하다. 참말 햇빛과 햇볕이 어우러져 밝고 따듯하다. 그런데 딱히 갈 곳이 없다. 아파트 승강기를 내려설 때까지는 흥에 겨웠고 승강기 안에서는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며 나름 만족한 미소까지 머금었었다. 그런데 나의 발걸음이 머뭇거린다. 어디를 갈까? 때마침 생각난 것이 4일 이라는 날짜. 그렇다 4일과 9일은 유성 장날인 것이다. 가자. 세상 시름 모두 잊게 해주는 그 곳. 오늘 그곳에 가면 된다.
걷기엔 거리가 좀 먼 듯한 4k 남짓한 곳. 운동 삼아 걷기를 작정하고 따듯한 봄 햇빛에 나를 내어준다.
결혼하고 유성에 살면서 유성 장터는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결혼하고 딱히 갈 곳도, 친구도 없는 난 늘 유성 5일장을 기다리곤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장 구경을 다니곤 했다. 그래서 인지 유성장엘 가면 맘이 편하다. 딱히 살 것이 없어도 사람 사는 정이 고플 때면 이곳을 찾게 된다. 바람 없는 날씨, 따듯한 빛 아래 모인 사람들. 왁자한 노점상들의 흥정에 활기가 넘치는 장터다,
빠알간 대야에 담긴 쭈꾸미가 그 빨판을 척하니 대야에 붙이고 있다. ‘난 싱싱해요. 어서 날 데리고 가요’ 하는 듯, 마치 녀석들은 오글거리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홀린다. 그 옆에 사촌지간인 오징어가 붉은 옷을 입고 유유히 유영(遊泳)중이다. 생선전의 생선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들로 팔려나가고 있다.
푸성귀가 팔려나가고, 봄 과일이 팔려나간다. 거기에 주고받는 웃음이 실려 나간다. 봄날의 장터에선 겨우내 보지 못한 웃음과 후한 인심이 팔려나가고 있다.
“뻥이요” 하는 주인장 고함 소리와 함께 “뻥” 하고 터지는 하얀 연기 속 튀밥. 깜짝 놀라 가던 길 멈춘다. 수북이 쌓여있는 찰강냉이, 메강냉이, 쌀, 보리, 떡 튀밥들. 그 중 메강냉이 한 봉에 삼천 원. 두 봉에 오천 원. 그 흥정에 두 봉지 사들고 갓 튀겨 나온 고소한 쌀 튀밥 한 줌 욕심 것 집어 입에 넣는다.
장터의 모습은 봄빛과 같이 해맑고 따스하다. 그러니 마음이 편하다. 스쳐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이 봄에. 이 유혹에 홀려 나온, 나와 같은 사람들. 그들의 미소가 꽃처럼 활짝 핀다.
울긋불긋 예쁜 꽃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쪼그리고 앉아 녀석들을 본다. 형용할 수 없는 예쁜 녀석들. “어휴 예쁘다” 그저 감탄만이 나올 뿐이다. 오늘은 누굴 골라볼까? 노랑이. 빨강이. 주황이, 오묘한 색깔의 녀석들. 유독 눈길이 가는 녀석이 있다. “너, 당첨” 붉은 색과 노란 색이 어우러진 베고니아다. 예쁜 꽃망울에 맘이 간다. 언젠가 따스한 빛으로 활짝 필 너의 모습을 생각하며 무념무상 행복한 미소가 지어진다.
은사님을 생각하며 분홍색 베고니아와 노란색 베고니아가 함께 섞인 화분을 골랐다. 분홍색은 ‘나’를, 노란색은 ‘은사님’을 상징하려는 의미에서다. 베고니아 종류는 1만 가지가 넘는다 한다. 그런데 내 손에 들린 베고니아는 꽃덮이가 볏(닭 볏) 모양으로 생겼다. 대부분의 베고니아는 건조에 약한 부드러운 식물이라 한다.
내년에는 베고니아 잎 몇 개를 꺾꽂이 하여 심었다가 은사님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려 한다. 누구에게나 스승과 은사님은 있게 마련. 그러나 나와 은사님의 관계는 특별하다. 백락일고(柏樂一顧)의 백락이 되어 돌보아주신다. 봄의 햇살처럼 따스하고 포근하다. 이제는 세월이 지나 여든의 작은 거인이 되신 선생님. 선생님을 볼 때마다 작은 거인이란 단어가 생각난다. 누구든 품을 넉넉한 가슴을 갖고 계신 분, 모두에게 희망으로 다가오시는 분. 마치 노란 베고니아의 꽃망울이 활짝 피어 그 아름다움을 맘껏 뽐낼 수 있도록 따듯한 빛처럼 다가오시는 분. 그래서였을까? 선생님이 계시기에 난 꿈을 꾸고 날개를 달며 선생님과 손을 마주잡고 여성 갱년기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왔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더 나은 나 자신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아름다움을 염원하는 현재로부터의 출발인 것이다.
이 따스한 봄날. 봄 햇살에 봉우리가 터지듯, 내 삶도 아름답게 터질 것이다. 그리고 다짐한다.
먼 훗날 이문열의 ‘금시조’ 라는 소설속의 주인공 ‘고죽’이 되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