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스크(mask)가 뭔데 이 난리인가. 어지간히 떠들어 대는 바람에 마스크 태풍이 불고 있다. ‘ 마스크대란’ 이라는 신조어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대며 법석을 떨고 있으니 심란하기 그지없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염치 좋게 상륙한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스크타령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전염병이 옮아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 절박하고 다급한 사정에 이제 절실한 필수품이 되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든 마스크난리에서 자유롭지 않은 판국이다. 매스컴에서 서둘러 일러주는 마스크의 가치에 놀란 국민은 농협 하나로 마트나 일반 약국을 찾아 돌며 마스크를 사려고 애를 쓰는 광경이 너무나도 처량하고 처참하다.
우리말로 탈이나 가면으로 으레 번역되는 마스크는 서양에서,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는 가면무도회(mask ball)나 가면극을 연상시키는 어휘이다. 구실이나 핑계를 댈 때에도 사용되는 마스크는 때로 위장물, 엄폐물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복면이라는 어휘로도 쓰인다. 고약한 양반놀음을 풍자하기 위해 만든 탈춤이 서민의 애환을 그려냈는가 하면 서양의 가면극은 18세기 영국의 경우 남녀가 은근슬쩍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는 상황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러기에 탈이나 복면을 일컫는 마스크는 대저 얼굴가리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걱정덩어리로 여기는 마스크는 ‘입마개’인 게 틀림없다. 흔하디흔한 ‘침’이 튀어나가지 않거나 튀어들어 오지 못 하게 하는 기구요 장치이다.
그렇다면 마스크대란이 아니라 입마개난리라고 불러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 입마개’ 라는 말에 매달리다 보면 입을 싹 막아버리는 뜻이 될 테니 이 또한 정당한 의미를 확보할 수 없다. 이른바 ‘ 자갈’ 을 물리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곱지 않게 말하는 걸 막으려면 ‘입 닥쳐!’하고 소리를 지른다. 영어도 ‘샤랍 Shut up!’ 또는 ‘샷더마우드 Shut the mouth!’라고 소리 지르기 일쑤이다. 그렇다면 지금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상황에서 마스크는 피차간의 방어용 물건에 진배없다. 그러기에 막말로 ‘죽으나 사나’, 아니 죽어라 하고 아등바등 마스크 판매장을 찾기 마련 아닌가.
오늘 아침에 이 난리 통을 직접 체험했다. 오전 일곱 시에 아침밥을 서둘러 먹고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는 농협 하나로 마트에 달려갔다. 그 이른 시각에 벌써 자리를 잡아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 뒤꽁무니에 다가갔다. 맨 앞에 허름한 운동모자를 눌러 쓴 노인이 서 있다. 그 뒤로 여덟이나 되는 부인네들이 줄을 이었다. 같은 동네나 아파트 거주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다. 서너 여인이 앞뒤를 돌아보며 수다를 떠는 모습에서 짐작이 갔다. 주고받는 말 가운데 앞서 며칠 동안 이곳에 왔었던 게 들어나기도 했다. 이윽고 번호표 배부시각 9시가 가까워지면서 마스크수요자의 수가 늘어났다. 별로 넓지도 않은 마트 전면 공간이 빈틈없이 사람들로 채워졌다.
여기에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이 몇 개 서 있다. 90대 초반의 노인이 한 기둥에 팔을 감고 엉거주춤 허리를 달래고 있었다. 민망하고 안쓰럽고 딱하게 보이는 참이라 다가가서 도우려고 마음 먹는 순간 50대 장년 한 분이 그 노인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나 보다 30초가량 행동이 빨랐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부축해 가고 그러자 뒤이어 청년이 청소부가 정리해 놓은 신문 뭉치를 가져가 앉을 자리에 깔아 드렸다. 미풍양속의 진실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나도 미수(米壽)인지라 다리 힘이 느슨해지는 판이었지만 그 인정 어린, 효심 쌓인 광경에 배달민족의 긍지를 느끼는 행복을 얻었다. 흔히 자식들이 늙은 부모를 위해 마스크를 장만해 드린다는데 이 경우의 노친은 그런 환경이 없었는가 보다. 긍휼의 필요가 바로 이런 때가 아닌가.
그러기에 주착 바가지라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의 양식과 양심을 새삼 강박관념으로 새겨들어야 할 인간들이 누구인가 생각하게 된다. 일찍이 중국의 후안성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 질병을 깔보았는지 반가워했는지 몰라도 전문가들의 끈질긴 권고에도 불구하고 입국제한도 하지 않고 되레 이웃 간에 잘 해보자는 식으로 시진핑과 통화에 여념이 없었던 문통의 작위적 행위는 역사에 찬란한 기록으로 남을진저. 사귀고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그 인품을 알 수 있다고 선현들이 잠언으로, 실천으로 가르쳐 왔다. 그러하거늘 지금 한창 데리고 노는 사람들이라는 게 한결같이 반골정신에 볼셰비키이념으로 훈련되고 악랄한 말투로 언어공격술을 발휘하는 속성의 소유자들이라 하는 짓마다 ‘꼴값’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정객들의 작태에 놀라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나라 운운하면서 앞서의 노령인구마저 몸서리치는 현실정치구도요 현장정치기술이다. 과분한 치사가 될 염려가 있지만 간신히 ‘돌대가리’를 면제받은 풋내기 정치인, ‘못대가리’를 면장한 아마추어 행정가들로서는 너무나도 힘에 겨운 고역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위태로운 국면을 제대로 헤쳐 나가기에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궁금하다. 첫발을 잘못 디뎌버린 탓에 이 고생을 하는 국민을 저들은 앙 모른 척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문빠들이야 제 풀에 춤을 춘다 한들 어쩌겠느냐 만은 5천만 국민 대부분이 고생하며 일그러진 삶을 이어가는 판국에서 이 마스크 지랄병마저 지겹고 진저리나지 않는가. 예측도 비축도 몽땅 손사래를 쳐놓다가 큰 일이 벌어져 당황한 나머지 난리 통만 만들어 놓은 정부를 어느 누가 따르랴, 총선을 코앞에 두고 있는 국민이여, 깨어나라 각성하라. 총선으로 구정을 내는 데 주저하지 말지어다. 문빠들의 ‘아침 이슬’이 밝고 맑고 뜨거운 햇살에 날라 사라져 가리니. . . . .
윤 기 한(상임고문, 충남대 명예교수, 전 충남대 대학원장, 시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