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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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의 미학
  • 文 熙 鳳(시인·평론가)
  • 승인 2016.11.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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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 熙 鳳(시인·평론가)

목숨을 지닌 것들은 속삭임을 만든다.
오두막집일망정 사랑이 익어가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우리집이다. 호박꽃 같은 램프불이 피어 있는 그 옛날 내가 살던 초가집 안방.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언제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와 함께 사랑 익어가는 소리가 또렷이 들리는 것 같다.

화사했던 목련이 진 자리에 몇 줄기 바람결도 잔잔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다. 여름철 한낮이면 장마에 걷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와 어울려 감나무에 모여 있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워 훌륭한 하모니를 이룬다. 폭신폭신 하얀 억새꽃을 밟으며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시내버스를 탄다. 후미 부분에 앉고 선 학생들의 속삭임이 살아있다. 그리 대단한 이야기도 아닌데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속삭여댄다. 속삭이는 것인지 떠드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생기발랄함을 보인다.

저녁 늦은 시각 집 근처의 대학 교정에 나가본다. 긴 의자는 저마다 주인들을 맞고 있다.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한 여성과 긴 바지 차림의 짧은 머리를 한 남성들이 짝을 이루어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정말 소근거림이다. 가끔씩 활짝 펴진 진달래 같은 웃음을 보인다. 우리의 음계 중 ‘솔’ 이상의 음은 나오지 않는다. 저음가수 남일해를 닮았나 보다.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는 소근거림이겠지.

 ‘거실의 색상은 뭘로 하고, 장롱과 화분과 액자의 배치는 어떻게 하며, 2세의 출산은 언제쯤으로 할까’를 상의하고 있겠지.

거리를 지나다보면 ‘애완동물방’을 쉽게 만난다. 어여쁜 강아지들로부터 새끼돼지, 원숭이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귀염둥이 강아지들의 경연에도 으레 소근거림이 따른다.

한 마리가 앞서면 다른 한 마리는 뒤따른다. 우승의 향방을 점치기란 나와 같은 둔재로선 어려운 일이다. 앞서던 강아지가 슬쩍 넘어지면 뒤따르던 강아지가 슬쩍 뒷다리를 문다. 그러면 ‘아야, 아파, 살짝 물란 말야.’ 애교를 부리며 빙글빙글 돈다. ‘아프긴 뭐가 아파. 마사지를 해주는데.’ 하며 하던 장난을 계속한다.

그리곤 다시 일어나 또 달린다. 이백 미터 코스(?)를 벌써 몇 바퀴째 달리는지 모른다. 그들의 눈동자엔 윤기가 나고 안면근육엔 웃음이 잔뜩 묻어 있다.

그 옆 가게엔 여러 종류의 새들을 취급하는 ‘조류방’이 있다. 금슬 좋기로 이름난 잉꼬들이 보여주는 애무 장면도 쉽게 접하고, 예쁜 날갯짓으로 상대를 유혹하는 이름 모를 새들의 천진스러운 모습들과도 쉽게 만난다.

그들의 입에선 천상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어여쁘고 달콤한 목소리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또르르 또르르 흘러나온다.

시간이 날 때마다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무엇 때문에 당신은 산을 좋아하는가?’라는 우문을 던질 때가 있다. 그 때마다 그들은 사방마다 청정한 메아리를 토해내는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는 현답을 하고 있다.

갖가지 새들이 나와서 온갖 소리로 아침 햇살을 맞는다. 까치가 날쌔게 허공을 차오르고 청설모가 쪼르르 나무를 타고 오른다. 이런 장면을 접하면 심장까지 덩달아 덩더쿵 덩더쿵 방아를 찧는다.
  바람이 없는 날 나무기둥에 조용히 귀대어 보면 나뭇잎 그들만의 달콤한 소근거림을 듣는다. 비를 맞은 나뭇잎들은 오래도록 물방울을 떨구며 그들만의 환희에 젖어있다.

    

빗소리는 산(山) 식구들이 빚어낸 화음이다. 소나무, 상수리나무, 단풍나무, 오리목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다 다르겠지만 어느 소리 하나 튀지 않고 듣는 이의 마음을 비질해 준다.
  더 높은 곳에 올라보면 봉(峰)이 봉을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야호’를 외쳐 보라. 산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산에는 뛰노는 맥박이 있고, 웅혼한 정기가 있다.

높은 산일수록 깊은 계곡을 갖고 있다고 했던가. 인적이 닿지 않았던 계곡에 들어가 보면 이 세상에 나오기 전 어머니 뱃속에서 들었던 그런 소리들과의 교우가 가능해진다.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가르침과 같은 소리들이다.

 인공폭포에서 들을 수 있는 그런 울림이 아니다. 겸손하고 인자하며 무게가 실린 그런 소리들이 너와 나의 구별 없이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는 곳이 바로 심오한 계곡이다. 살아있는 계곡이다.

동물계의 왕자 호랑이의 포효도, 산속 맹주인 사자의 포효도,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랫소리도, 나뭇들이 내는 음향도, 108계곡 계수의 합창소리와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냉방장치나 선풍기 바람이 강바람이나 솔바람을 이기지 못한다. 선풍기 바람은 규칙적인 기계운동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한참 쐬고 나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은 그 방향이나 강약이 불규칙적이면서도 자연스런 변화의 리듬을 띤다. 게다가 갈대 서걱이는 속삭임까지 덤으로 들려주니 오장육부가 다 시원해진다.

바다에 나가본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저 멀리서 반짝반짝 고단한 항해자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등대 곁을 지나는 파도들의 우렁찬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의지가 약한 자여! 나에게로 오라.’ 파도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뇌이며 바다를 찾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사해 준다.

크고 작은 항구의 아침은 어선의 뱃고동 소리로 시작된다.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갈매기 떼는 고요하던 항구를 화들짝 깨워놓는다. 여명을 뚫고 하나둘 들어오는 고깃배 주위로 갈매기 떼가 호위하듯 에워싸고 즐거워 소리를 지른다. 그들은 아침에 일터로 나갔던 배들이 돌아올 때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다가 맞아주며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지난 겨울 폭설에 자빠진 아름드리 소나무에게서는 숨소리를 들을 수 없다. 숨소리가 사라지니 새도 짐승도 찾지 않는다. 적막강산이다.

농부는 흙이 살아가는 소리를 듣는 특권을 가졌다 하는데 나는 그 이상의 여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내일 아침에도 일찍 산에 올라 새로운 세상을 여는 창조의 굉음을 듣는 그런 특권을 누려보고자 한다.

살아있음은 하나의 축복이다. 목숨을 지닌 것들은 모두 속삭임을 만든다. ‘도레미파솔라시도’ 한 음계가 끝나고 다음 음계까지 속삭임이 계속될 때 건강은 보장된다. 살맛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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