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등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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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등 뒤에
  • 김지안 / 수필가(수필예술 회원)
  • 승인 2018.01.31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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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홀로 되신 어머니는 엄한 분이었습니다. 운동회와 소풍 때 한 번 따라오신 적이 없고, 비 오는 날 학교에 우산을 갖다 준다는 것은 어머니 사전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오빠에게 줄 고기를 딸들이 먹을까봐 찬장에 몰래 숨겨두곤 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어머니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정서적으로 일찌감치 독립했습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어버이 날 학교에서 불러야 했던 낯간지러운 노래는 나의 어머니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머니 이야기만 하면 눈물 난다는 이들이 의아했습니다. 어느 날 밤, 누가 이름을 부르기에 자취방 문을 열어보니 먹을 음식을 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어머니가 산을 넘어 오셨더라는 이가 부러웠습니다. 우아한 한복에 양산을 들고 학교에 찾아와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어머니를 둔 친구가 부러웠습니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만 그리워했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에 계시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어머니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처럼 자상한 남자를 찾아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습니다. 나는 딸에게 어머니와는 다른, 친구 같고 자매 같은 엄마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중년이 되었습니다. 지병이 있는 남편의 건강이 큰 걱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린 딸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지금의 나보다도 적은 나이에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되신 어머니가 그제야 떠올랐습니다.

교회에서 점심을 먹으려다 딸이 졸라대어 그냥 나서는 나를 보고 "점심 먹고 가지 그러냐, 응?" 무심한 어머니답지 않게 성화를 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친구 할머니께서 당신은 딸이 없다며 아쉬워하십니다. 어머니는 "난 딸내미가 넷 있어요. 하하하” 집에 보물이 있는 사람처럼 웃으십니다.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실감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그러고 보니 엄했던 어머니 덕분입니다. 아침마당에 출연하여 가족을 찾는다고 호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러고 보니 무뚝뚝하기만 했던 어머니 덕분입니다. 자정을 넘긴 늦은 밤, 고단한 몸으로 윗목에 홀로 앉아 해진 양말을 꿰매듯 가족들의 삶을 꿰맸던 어머니. 소설도 그림도 음악도 영화도 모르고 안개에 싸여 고된 일생을 살았습니다.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느냐고 여쭤보아야 “내가 고생을 많이 했지.”생각에 잠긴 얼굴로 대답하십니다. 큰 목청 뒤에 연약함을 숨기고 오남매의 울타리로 살아오신 어머니를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께 다녀왔습니다. 함께 커피를 마시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50대에 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한 오빠는 가난한 목사님입니다. 오빠 부부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작은 아파트는 그러나 햇살처럼 따스하고 밝은 사랑이 가득합니다. 오빠는 어머니를 업고 벚꽃 핀 계룡산에도 오르고, 어깨를 감싸고 청남대에도 모시고 갑니다. 그때 오빠는 얼굴에 다정한 아빠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자매들 몰래 혼자서 어머니에게 고기를 얻어먹은 값을 하는 모양입니다. 애틋한 막내딸과 금쪽같은 손자를 가슴에 묻은 어머니. 감사하게도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모두 지나 평온한 노후를 누리고 계십니다.

 돌아오려는데 어쩐 일로 어머니가 따라 나오십니다. 관절염으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함께 걷다가“잘 가거라.”하고는 돌아서십니다. 무심한 어머니는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십니다. 그 무뚝뚝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어머니가 동네 어귀까지 배웅하러 따라와 주신 것이 사랑임을 이제 압니다. 사랑의 언어는 제각각 다른 것이니까요. 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습니다.

 문득 어머니가 뒤돌아봅니다.

돌아보는 어머니의 등 뒤에 어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등 뒤에 아우라처럼 아버지의 모습이 어립니다. 어머니는 그러고 보니 우리 오남매에게 어머니이자 아버지였습니다. 내게 어머니가 있다는 것, 그 엄연한 사실은 새삼 나의 존재가 사랑으로 비롯되었음을 일러주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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