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다니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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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다니는 길
  • 수필가/ 박미련
  • 승인 2016.07.1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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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 때를 떠올려 보았다. 학교를 가려면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길이 아닌 곳에 순전히 우리의 힘으로 길을 낸 적이 있다. 산허리를 따라 이미 길은 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학교를 가려면 늘 마음이 급했다.

학교는 지척인데 돌아가려니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았다. 성질 급한 친구들이 선발대가 되어 길이 아닌 가시덤불 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가파르게 오르내려야 하지만 시간을 줄여주는 그 곳에 마음이 갔다.

학교 가는 길이 힘겨웠던 우리는 하나같이 같은 생각이었던 게다. 얼마 아니 되어 너도 나도 새로 길을 내는데 힘을 모았다. 세상 때가 묻지 않은 굽은 돌멩이도, 거친 땅 기운을 무릅쓰고 박차고 올라온 무성한 잡초들도 은근슬쩍 허리를 굽혀 주었다.

우리의 간절함이 그것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하루 이틀, 일년 이년이 지나면서 반들거리는 지름길이 되었다. 그예 번듯한 신작로가 되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하여 만든 길이었는데 오십이 넘어서야 겨우 찾아가 보았다. 우리가 쉴 새 없이 오고가며 다진 맨질거리던 옛길은 흔적조차 없었다. 대신 옆으로 낯선 포장도로가 긴 얼굴을 곧추 세우고 있었다. 어림하여 이곳이겠다 싶어 겨우 발길을 옮겨 보았다.

한참을 찾다보니 가시덤불 속에서 옛길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놀랍게도 밤낮없이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그 곳에 있었다. 반갑다고 속살거리기도 하고 왜 이제야 왔냐고 샐쭉 돌아앉기도 했다. 옛길도 서운함에 문을 닫아걸고 더 이상 길을 내어 주려 하지 않아 끝내 발길을 돌렸다.

명희, 정화 그리고 또, 그리운 친구들의 이름을 떠 올려보았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친구들은 하나 둘 대도시로 뿔뿔이 흩어졌다. 절친 정화와도 그 오랜 시간 함께 하였는데 내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녀에게 가는 길도 희미해져 갔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또렷한 길들이 가물거리다가 언제부턴가 막혀 버렸고 그 후로 내 인생에는 새로운 길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생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서러워하거나 노여워 말라던 시 구절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요 며칠 난 또 세월의 무상함에 상처를 입었다.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다니러 온다는 소식이다. 대학교 시절, 시대의 아픔을 나눠진 알진 친구이다. 그녀의 긍정적이고 호탕한 성격 덕에 먹구름을 걷어낸 날들이 또 얼마였던가. 오랜만에 보는 거라 며칠 전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이런저런 계획들을 잡아놓고 친구를 기다렸지만 들어왔을 날이 한참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일까? 여러 날이 지나서야 겨우 sns로 자신의 근황을 알려왔다. 도착했고, 친구들 만나 잘 놀고 있다고. “…….” 가슴 깊은 곳에서 쑤욱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에게 가는 길은 훤하게 뚫린 신작로라 여겼는데 어느새 덤불로 무성하다니. 양쪽을 호위하던 곧은 소나무는 어디로 가고 싸리나무 망개나무가 길을 덮었는가. 착각도 정도껏이지, 가꾸지 않아도 그녀에게 난 길은 늘 반질거리리라는 내 오만이 된서리를 맞았다.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이었는데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다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며 세월을 탓하기도 하고 스스로 길이기를 포기한 참을성 없는 길 자체를 원망하기도 했다.

물리적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도 소원해지나보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세월 따라 각자의 인생을 살다보니 그녀와도 마음속에 가두는 말이 많아졌다. 속없이 주고받던 말들이 언제부턴가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할 말과 해서는 아니 될 말을 미리 고르는 과정이 필요해지기도 했다. 마음이 다니는 길에 이끼가 끼고 무서리가 내렸는데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아 마음을 정리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어 왔을 뿐이다. ‘잠시 한 눈 파는 것일 뿐이야.’ 곧 제자리를 찾을 거라는 최면을 무시로 걸었던 것 같다.

이렇듯 서로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처음 얼마간은 뭐가 됐건 손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안달하다가 원망하다가 불쑥 화를 내다가 삐치기도 했던 것 같다. 모처럼 만나면 그 친구도 휑한 가슴이었을 텐데, 그 때는 내 기분을 추스르기도 바빴으니 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용량은 턱없이 부족했겠다. 애면글면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문득 세월에 맡기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들을 거미줄처럼 만들면서 지난 인연을 놓지 못하여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욕심이지 싶다. 무엇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저 물처럼 흘러 보내야 훌훌 가볍게 살 수 있을 터인데...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선연한 것들이 있다. 사랑과 수고의 정도에 따라 정직하게 돌려받는 따뜻한 것들,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서 더 많은 위로를 받는다. 뭇 마음들이 드나들어 크고 반질거리는 길을 가진 이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세상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부터 너도 나도 길을 낸다.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운 것이 이것이다. 상대의 호응이 있어야 하고 상대는 저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길을 내어 가다가 한 곳에서 운명처럼 만나야 한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어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세상살이가 그 길로 인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오십이 넘도록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욕심이 많은 탓인지, 한번 인연을 맺으면 잘 끊지를 못한다. 사라지는 길이 아쉬워 온 길을 되짚어 걸은 적도 있다. 혼자의 힘으로는 부치는 일이었지만 상처받은 상대방의 마음을 어루만져 끝내 다시 길을 내었다. 이 무슨 오기란 말인가.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짓이다. 그저 세월 따라 흐르는 마음의 길을 순순히 받아들일 일이다.

유독 많은 길을 만들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용량의 한계를 느끼지 못할 만큼 지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부르면 어디서든 달려와 줄 것 같은 믿음이 있다. 어떤 얘기를 해도 어깨를 토닥여 줄 것 같아 편안하다. 그들은 마음이 다니는 길을 여는데 주저함이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마 못 가 오랜 친구처럼 익숙한 사이가 된다. 유지도 탁월하다. 어지럽게 뻗쳐 있는 여러 갈래 길에서 정겨운 옛이야기가 넘쳐흐른다. 마치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노련한 지휘자처럼 한 곳도 소홀히 다루는 법이 없다. 가끔 그런 사람들을 닮으려고 애를 써 보지만 이내 허망하게 그들과 다른 익숙한 나로 되돌아오고 만다.

앞으로 난 또 얼마나 많은 길을 만들며 살게 될까. 분명한 것은 점점 마음의 크기도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남은 인생 외롭지 않으려면 용량에 맞게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지 싶다. 새로운 사람들과 더 많은 길을 내기보다 있는 길을 잘 가꿀 일이다. 손에 꼽히는 다정한 사람들 생각에 오늘도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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