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빨리 돌아간다.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뉴욕거리를 걷다 보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가 들린다. 액슨트가 두드러진 영어와 ‘땃따라 땃따라...’하는 서반아말(Spanish)이 귀에 거슬린다. 그들의 빠르게 지껄이는 말이 신경 쓰이게 한다.
미국의 여타 지방과는 달리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유색인종이 많이 눈에 뜨인다. 이민의 나라라는 것을 실감나게 한다. 그러니 온 세계의 민족이 사는 지구촌을 느끼게 하며 세계 속에 산다는 생동감까지도 갖게 된다.
그런데 미국의 독립을 이루어낸 청교도들과 그래서 텃세를 부리는 16-17세기 이민자들인 앵글로 색슨족과 그들의 후예들 그리고 유럽계 백인들이 맨하튼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을 잘 볼 수 없다. 어디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하고 궁금해질 때가 많아진다.
옛 우리의 미국 이민상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지방의 다른 주 작은 도시에서 볼 수 있다.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고 그 나름대로 아직은 미국 신세계의 민주적 전통을 이어 가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한국인 고유의 끈기와 재주로 여러 분야에서 눈부실 만큼 성장해간다. 미국주류사회 진입에 크게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최상위 5%의 백인 백만장자들과 권력층은 전국적으로 민간 클럽과 별장이나 저택, 개인용 리조트와 농장, 최고급 호텔, 또는 개인 요트나 크르즈에 모여 담화를 나누는 경향이있다. 그들은 화려한 파티에서 춤과 음악을 마음껏 즐기는 실정이다. 일반 서민들은 그림의 떡 보듯이 그들의 존재를 뉴스보도나 TV화면에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얼마 전에 한인사회에 무료로 나눠주는 『뉴욕일보』에 “미국은 불원간 유색인종 국가가 된다”라는 제목이 들어있었다. 많은 유색인종 이민자들의 출산율이 높아 소수민족 신생아가 50.4%인 반면 백인 아기는 49.6%라고 한다. 그 기사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필자는 50년 전 학생시절에 인류학 교수가 “미래의 세게는 유색인종(Brown complexion)이 대표적이 될 수도 있다”라고 한 강의 중 한마디가 머리에 떠올랐다. 당시 어린 마음에 무슨 공상 같은 소리인지 이해를 못했지만 이제는 그 예언이 현실화되는 듯하며 언어와 인종문제가 다른 차원으로 구별되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케 된다.
언어는 인간의 사상, 생각, 감정을 표시하는 도구이다. 표현방식에서 그 언어사용자의 특수한 문화를 느끼게 된다. 거기에서 울어 나오는 은밀한 뜻과 정감이 있어 모국어를 쓴다는 것도 향수를 달래는 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화창한 가정의 달 5월에 한국방문을 했던 필자는 당시 모국에서 들리는 소리가 한국말뿐이었다. 절대 다수가 황색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거리를 걷는 것을 보니 “고향에 돌아왔구나”하는 편안한 마음과 안도감을 가졌다.
미국은 영어가 주된 사용언어이다. 백인들이 지배적인 세력이다. 그러나 근세기에 들어 엄청난 유색민족의 이민으로 이제 다민족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이른바 ‘제2언어(Second Language)’라는 용어가 되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현실이다.
소수민족들은 가정에서 제2의 언어인 자기네 모국어를 쓴다. 부모는 2세에게 모국어를 그 특유한 종교와 문화테두리 안에서 가르치며 전통을 보존하고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한국인 1세 이민자들도 한국어가 제2의 언어이기에 그런 방식이 매한가지로 이루어진다. 타 인종 소수민족들 역시 각기 그들의 모국어를 자손들에게 같은 정신으로 가르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수백 년이 지나도 초대유대인 기독교도(Diaspora)들은 히브리어와 유대종교를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만이 아니다. 중국 사람들은 어린아이에게 영어뿐만 아니라 한문을 열심히 가르친다. 중국인 어머니가 도서관에서 자기 아이들에게 한문으로 된 책을 읽게 하면서 자기들 모국어를 가르치는 놀라운 장면을 볼 때 감동을 받기도 한다.
특히 미국에는 히스패닉(Hispanic)계 민족이 흑인들을 추월할 정도로 많아져 영어 외에 스페인어를 모르면 작은 상점이나 야채가게 또는 식당과 세탁소 그리고 주유소 등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일꾼과 직원들과의 의사소통 때문에 사업경영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근래에는 범사회적으로 어디에 가나 서류 광고물에 영어와 스페인어가 2중으로 게재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라 중국인도 많아져서 중국말 번역도 많아졌다. 인도사람도 급증했는데 아직은 번역을 해 받지는 못한다. 한국인 디아스포러는 그 수가 적어 좀 소홀이 취급되어 어려움이 많다. 그러니 영어를 열심히 배우는 것이 아세아계 미국인으로 사는 첫째 과제가 아닌가 싶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차원에서 한국에서는 언어사용이 많은 변화를 겪는 듯하다. 선교사들로부터 일찍이 전도 받은 한국기독교가 다르게 발전해 왔듯이 한국인의 언어생활도 민주적 기본정신의 깊은 이해 없이 언어의 혁신으로만 모방하는 것 같다. 필자는 30 여년전에 갑 자기 ‘운전수’를 ‘운전기사’라고 불러야 된다는 말을 들었다. ‘기사’는 기술자를 일컫는다.
기술자는 흔히 영어로 ‘테크니션(technician)’ 또는 ‘엔지니어(engineer)’로 불려진다. 단순히 자가용이나 운수업체 트럭, 밴, 택시를 운전하는 사람들도 기사라고 하니 혼돈되기 쉬웠다. ‘운전자(driver)’를 ‘운전사(chauffeur)’라고 말하면 그 말속에 담겨 있는 비하의 느낌이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이조시대의 ‘머슴 노예제도’ 여파로 사회에 ‘양반:쌍놈’의 계층의식이 언어에 스며들었다. 그러니 언어개혁이 필연적이었다. 그 예로 ‘식모’ 와 ‘청소부’ 등의 말을 ‘도우미’니 ‘환경미화원’ 등으로 고쳐 우리의 고정관념과 인간을 차별하는 의식을 없앤다는 정신에서는 찬성한다. 그러나 요새 들려오는 소문에는 병원의 간병인을 ‘선생님’이라고 까지 부르라고 한다는 것은 좀 너무 정도가 지나치며 언어수정작업 정신에서 이탈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언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표현방법으로서 사람을 기쁘게 해줄 수도 있으며 슬프게도 만든다. 또 격려도 되고 정을 줄 수도 있으나 자존심을 극도로 상하게 하는 멸시적 언어가 자살로 이어질 정도의 해를 주는 칼 역할도 한다. 오해를 일으키지 않게 언어와 억양 등 모두 말들에 내포되어 있는 생각이나 느낌이나 이미지를 잘 전달시켜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어 정화작업은 계속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