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락가락하는 일요일이다. 태산회원 10여 명이 일회용 우비를 입고 세종시 비학산(飛鶴山)을 오르고 있다. 밤새 침묵의 미덕을 보이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수런수런 살아 움직이고 있다.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신록이 이젠 녹음으로 변해가고 있는 시점이다. 사위는 이슬비 소리에 젖고, 연둣빛 물감으로 칠해져 나와 같은 안구 건조증 환자에게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아카시아 향이 빗속을 뚫고 내 후각까지 맨걸음에 달려와 품에 안긴다.
누구에게나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듣던 소리는 귀에 익숙한 고향의 소리처럼 들린다. 어려서 보았던 모습들을 다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추억의 장으로 달려가게 해주는 소리요 모습들이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대지 위를 이름 모를 새들이 날고 있다. 그 어린 시절에 들었던 그 소리,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럴 때 행복을 느낀다. 부끄럼을 좀 타는 아가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려고 커튼을 치고 있다. 그래도 좋다. 폐부 깊숙이 풍선 몇 개 매달면서 심호흡을 한다. 다리근육과 폐부속 기관들이 서로 흥겨워 춤을 추고 있다.
일출봉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아랫세상은 신비 그 자체다. 이슬비가 오는 관계로 멀리까지 바라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건너 계룡산, 저 건너 우산봉 등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하게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다가 가지랑이 사이로 바라보는 건너 세상은 또 다른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완전히 딴 세상이 연출된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이, 청년시절이 파노라마 되어 펼쳐지고 있다. 완전한 다른 세상이다. 바로 보이는 세상과 거꾸로 보이는 세상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음은 얼마나 큰 영광인지.
바로 보이고, 거꾸로 보이고, 작게 보이고, 크게 보이고… 그 속에서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컸던 것이 작아져 보이고, 작아보였던 것이 커 보이는 그 기이한 현실에 그만 넋을 잃는다.
몇 억 불 수익으로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보다 연탄 몇 백 장 들여놓고는 행복해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러한 삶을 나는 사랑한다. 어렵사리 씨 뿌려 가꾸는 텃밭에서 비 개인 다음날 무성하게 자란 풀을 베다가 풀섶에 가려진 커다란 호박을 발견했을 때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얼마 전 감을 따기 위해 감나무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도 나는 새로운 발견을 했다. 지상에서 엄청 크게 보이던 것들이 그렇게 작아 보일 수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간 감나무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아래 세상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런 세상은 아니었다. 감나무 위에서의 깨달음은 나만이 누리는 행복 중의 행복이다. 사색은 삶의 위대한 예술 중의 하나이다. 묵은 것을 떨쳐 버리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 친구 중에 약속시간을 대체로 안 지키는 사람이 있다. 일찍 온 친구들은 ‘어, 그 사람 아직 올 시간이 아니야.’ 하면서 너그럽게 기다려 주는 반면 개중에는 ‘허, 그 사람 안 되겠는데.’ 하면서 허용하지 못하겠다는 친구도 있긴 하다. 그 친구는 그런 뜻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 생각을 바꿔야 한다. 끝없이 변모하고 새로이 형성되는 사고의 틀을 바꿔야 한다. 세상을 새롭게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오늘 비학산 일출봉에 올라 세상 거꾸로 보기는 나에게 있어 아주 큰 깨달음이다.
고정관념은 고정관념일 뿐 변모할 수 없는 그런 관념은 아니다. 그런 관념을 새롭게 바꾼다는 것은 창조요 발견이요 혁신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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