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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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서
  • 김지안/ 수필가
  • 승인 2017.06.07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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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다른 도시의 대학에 합격해 이사했다. 학교는 호수를 끼고 있어 집에서도 약간 떨어진 호수가 보인다. 금강의 조그마한 지류인 갑천 옆에서 살다가 이사하려니 사람보다도 갑천과 헤어지는 것이 아쉽고 슬프고 서운했다. 사계절의 갑천, 아침과 밤과 낮의 갑천을 나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 화가 나고 슬픈 밤에 갈 데라곤 늘 갑천이 전부였다. 갑천은 내 정신건강에 크게 도움이 되었고 나를 치유해주던 유일한 안식처였다.

  봄날 동네 꼬마들과 강아지들까지 총출동하여 사람냄새가 진하게 풍기던 벚꽃 축제가 갑천 곁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축제의 끝을 장식하는 불꽃이 밤하늘 가득 황금색 자잘한 꽃무더기로 피었다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딸은 매일 자정 가까이 연습실에 머물러서 작곡하는 바람에 데리러 갔다가 함께 밤의 호수를 걷는다. 오늘은 세 번째 곡을 만들어 ‘주피터’라고 이름 붙였다고 자랑했다. 장중한 곡이라 했고, 사람이 얽혀 있다고 했다. 재즈의 느낌보다는 발라드 곡에 가깝다고 했다. 케니 지를 많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걷다보니 어느덧 장미가 만발한 치과 대학 병원의 뜰에 이른다. 장미는 꽃 중의 여왕이라는 데 감히 이견을 달 수 없다. 밤의 장미향. 휴대폰 불빛에 비친 연노랑, 진붉은, 분홍의 장미송이가 내 얼굴만 하다. 갑자기 불쑥 한 송이 꺾고 싶다. 그러나 가시가 어머어마해서 곱게 바라볼 뿐이다. 장미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고달플 것이다.

 대학이 다섯 개나 있어서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이 동네에는 주로 대학생들이 거주한다. 20대 외의 다른 연령대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규모가 작지 않은 아파트와 대규모 원룸촌임에도 불구하고 적막하다. 없는 게 없이 지나치게 번화한 충남대학교 주변의 궁동은 그러고 보면 파라다이스에 가깝다.

 20대들의 식생활이 몹시 걱정된다. 맛집도 드물다. 이곳에 비하면 대전은 음식점 집집마다 맛집이다. 나도 까다로운 편은 아닌데 학생들이 그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좀 신기하다. 그나마 나은 것이 차라리 편의점 도시락이다. 샌드위치도 먹을 만하다. 그들은 술도 자주 마신다. 그간 어떻게 참았을까. 대학 엠티도 주로 날을 새며 하는 술 마시기 게임이다. 술을 마시며 허심탄회하게 서로 알아가는 기회가 아니라, 지면 술을 마셔야 하는 게임 위주다. 이해할 수 없다. 딸은 대학에서 가장 먼저 ‘소주’를 배웠다.

    

 기숙사나 원룸에 사는 학생들은 대부분 아침을 거른다. 그러고는 편의점 음식을 주로 먹는다. 햇반에 햄, 상업용 김치로 꾸려지는 식단을 생각하면 그들의 건강이 염려스럽다.

 담배 피는 여학생들을 자주 본다. 어른들도 모두 끊으려는 분위기인데, 남자친구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들을 곧잘 본다. 이상하게도 예쁘면 예쁠수록 불량해 보이는 것은 내 선입견일 것이다. 담배란 남자가 피우는 것이지, 감히 여자가...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부드럽고, 생명을 낳고 키우는 여성이므로 우려된다. 나중에 생명을 품었을 때, 이제 슬슬 끊어보자 마음먹는다고 단번에 끊을 수 없을 것이므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닌 딸은 예고와 학원을 거치며 음대의 체제에 익숙한 동기들에 비해 어려움을 겪는다. 알고 보니 학원에서 혹은 예고에서 미리 배웠어야 할 것들이 전무한 상황이다. 입학식 날 오후에 선배들과 밴드를 짜서 미리 작곡을 하고 연습을 하여 4학년 선배의 수업에서 연주를 해야 했다. 딸은 신종플루에 걸려 독감 고치려다 사람 잡는다는 타미플루를 먹고 수업에 간 참이었다. 통학할 때였다. 그는 대학에서 색소폰을 전공한다. 그런데 이 색소폰 소리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여자 선배는 음정이 맞지 않아 짜증이 난다고 하고, 다른 선배는 깡통소리가 난다고 혹평을 늘어놓았다고 했다. 그 선배는 다음 날 수업에서 동기에 의해 곡 표절을 한 것이 드러났다. 딸은 화장실에서 눈물을 떨구었다 한다.

 그는 저녁을 먹고 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학교의 연습실로 간다. 밤의 학교 연습실 계단에는 온몸을 버티고 선 철제 곰 조형물이 있다. 곰, 버티고 선 곰의 우직한 모습. 그 자세가 참으로 마음에 든다. 그렇게 버티는 것이다. 마늘을 먹으며 끝까지 견디면,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이 딸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잘 하거나 안 하거나 못 하거나 내 선생님이다. 그는 부드러운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낯선 풍경이 펼쳐지는 곳으로 이끈다. 갑천 대신 호수가 연인이 되어줄까?

집 가까이 접어드니 아카시아 향이 아슴아슴 번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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