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프랑스에서 IS 테러가 일어났다. 19세 소년이 80대의 신부님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모두가 좋아한 인자한 신부님이었다. 80대에 성당에 난입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이 예정된 삶인가? 운명을 알았다면 한 순간도 미소 지으며 살 수 없었으리라. 폭력적인 삶의 마무리. 범죄 사건들을 보면 연민, 의구심과 더불어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좋지 않다.
때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사랑하던 주변 사람들은 ‘자살생존자’라 불린다. 더불어 목숨을 끊을지 모를 부정적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마무리를 맞으면 좋겠다. 인간은 얼마나 연약한가. 매일의 일상이 무사히 지나가는 것이 때로 기적처럼 여겨진다.
예산의 봉안당에 갔다. 여동생이 거기에 있다. 동생은 10여 년 전 투병 끝에, 고 3인 조카는 그 다음 해 연이어 떠나갔다. 그들과의 가슴 아픈 사별의 경험으로 인하여 사람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이상 오로지 삶만을 생각하는 뇌구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이따금 어두운 웅덩이로 굴러 떨어지곤 했다.
동생의 작은 방 문 앞엔 말린 꽃 리스가 몇 개 걸려 있고, 리스 아래 가족사진과 '엄마'로 시작되는 조카아이의 편지들이 겹쳐 붙어 있다.
‘엄마, 저 졸업했어요. 아빠는 잘 지내세요. 천국에서 건강하세요.’ 이런 문장들을 보니 이젠 눈물이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마구 흐른다. 겨울의 예당저수지는 차갑게 얼어붙고 사방은 잿빛 안개에 잠겨 있었다. 마음마저 얼었는데도 눈물만은 뜨겁게 자꾸 흘러내린다.
순천향대학교 앞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렇게 부드러운 주꾸미볶음은 처음이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좋을 것 같다. “원룸 구하시나요?” 마약커피를 파는 찻집에 가는데 교문 앞에서 서성이던 아주머니가 수험생 가족인 줄 알고 붙잡는다. 연초록 봄이 되면 대학 새내기들로 붐빌 것이다. 새파란 남학생이 그 겨울에 얼음을 잔뜩 넣은 커피를 산다. 삶의 정경. 삶으로 생각이 돌아왔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이다. 반면에 카르페 디엠,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라는 호라티우스의 시 구절에서 유래한 유명한 말이 있다. 현재를 즐기라,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Yolo. You only live once(인생은 한 번뿐이다)의 줄임말이다. 이 문장을 딴 ‘Yolo 족’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죽음 없이 인생이 한없이 길다면, 삶 또한 한없이 지루하게 퇴색될 것이다. 시들어서 지기 때문에 꽃은 눈물겹게 아름답고, 죽음이 있어서 사람의 삶은 순간마다 애틋하고 소중하다. 새로운 봄이 오면 꽃은 다시 온 천지를 뒤덮어버린다. 나는 크리스천이므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죽음은 운명에 맡기고 우리는 그 또한 삶의 부분으로 순응하며 감사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인생은 한 번뿐이므로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는 욜로 족의 자세가 마음에 든다. 당면한 삶의 문제들과 부닥치며 지금을 충실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욜로 족이 되기로 했다.
“죽음에 대해 자주 말하지 마라.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인류의 역사상 어떠한 예외도 없었다. 확실히 오는 것을 일부러 맞으러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때까지 삶을 탐닉하라. 우리는 살기 위해 여기에 왔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그때까지 삶을 탐닉하자. 우리는 살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