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상태바
도둑
  • 文 熙 鳳(시인·평론가)
  • 승인 2017.10.26 18: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文 熙 鳳(시인·평론가

벌써 삼십여 년 전이다. 도마동 단독주택에 살 때인데 집을 비워놓고 며칠 나갔다 돌아오니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고구마 밭이라면 멧돼지 소행이라는 걸 확실히 알겠는데… 집안 정리를 하는데 며칠 걸렸던 것 같다. 기분은 또 얼마나 나빴던지. 패물이란 패물은 몽땅 사라졌다. 이불은 모두 꺼내 방안에 흐트러지고, 옷가지들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시에 주고 받았던 것들이어서 더 아쉬웠다. 그 후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장만하여 아쉬웠던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로부터 사십여 년에 흘렀다. 또 도둑맞은 것이 있다. 삼사십 대의 모습, 아니 오륙십 대의 모습이 어디로 갔는지 머리는 훌쩍 벗겨지고, 이마의 주름살은 더 깊어만 갔다. 몇 밤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옛날의 모습들은 모두 사라졌고,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아마도 세월이란 놈이 모두 훔쳐간 것 같다. 세월이란 놈한테 나의 모든 것을 빼앗긴 기분이다.

하기는 고갯길을 넘자마자 신록이었는데 어느새 단풍의 계절이 왔다. 그간 숫처녀의 풋풋한 살 냄새 같은 향기가 묻어나는 5월도 보냈는데 소녀의 젖가슴처럼 도톰해진 얼굴에 연지곤지로 단장하고 살며시 미소 짓는다.

팽팽하던 피부, 민첩하던 몸놀림, 쉼 없이 자판을 두들기던 속도감 같은 것들 모두를 빼앗기고 나니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하고 제대로 여행 한 번 못 했고, 사회에 대한 기여도 별것이 아니었는데 이젠 고물자동차가 되어 버렸다. 이마에 패인 주름, 거무죽죽한 검버섯, 앙상하고 마른 손, 세월은 구슬을 꿰듯 촘촘히 흔적을 남겨 놓았다.

모든 이가 잠든 사이 몰래몰래 살며시 와서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1년 2년 훔쳐가더니 오늘 아침 일어나보니 내 인생을 거의 다 가져간 것 같다. 세월은 참 몹쓸 놈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는 세월이란 놈이 시간까지 갖고 달아나는 바람에 내가 쓸 시간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인생살이 한 포기 들꽃이란 말이 사실 같다. 거울 속의 일그러진 내 모습이 미워 애써 외면한다.

거기다가 몸 구석구석 장기들의 기능마저 망가뜨려 놓았다. 우선 기억력, 수리력, 판단력, 상상력 등이 희미해졌다. 전립선 기능 이상으로 밤중에 한두 번 깨어나게 되고, 몸 이곳저곳에 돌이 굴러다닌다. 그래서 응급실을 찾은 것이 세 번이나 된다. 이게 오줌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와야 하나 그럴 생각이 없는지 심한 통증만 유발한 채 호흡을 곤란하게 만든다.

    

육십 대는 해마다 다르고, 칠십 대는 달마다 다르고, 팔십대는 주마다 다르고, 구십대는 날마다 다르다던 어르신들이 하시던 말씀이 실감나게 되살아나는 오늘이다.

그 씽씽하던, 참나무 같던, 세상을 호령하던 기개로 팔팔하던 내가 한 해 두 해 달라지고 있다. 자동차 수십 년 탔으니 고장날 만도 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오래 된 나무, 기력이 다 된 나무 같다. 바람에 쉬 부러질 것만 같다. 다시 찾을 수 없는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울 뿐이다.

꼬리 문 잠자리만 보아도 배꼽 아래로 손이 가던 시절은 어디로 줄행랑을 쳤는지. 흔들림 없을 것 같던 청춘에서도 이젠 바람소리가 난다. 숭숭 뚫린 고목을 관통하는 대책 없는 바람소리가. 서리 맞은 들국화 바람에 시들 듯 낡고 기력도 약해졌다. 보도를 걸으며 낙엽 뒹구는 소리를 듣는다. 싫지 않은 음향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 생각하는 게 낫겠다. 나무는 나이테가 하나씩 늘어갈수록 더 웅장한 소리를 내는데 내 나이테는 이제 고희를 갓 넘기고 나서 점점 야위어 간다.

요즘은 산에 오르는 기력도 전만 못하고, 운동신경도 무뎌졌고, 모든 것이 전만 못하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노래가 생겼는가 보다. ‘한두 번 사랑 땜에 울고 났더니 저만큼 가버린 세월,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라는. 저 세월도 고장이 나면 좋으련만 내 육신, 정신만 망가뜨려 놓고 고장도 없는 도둑놈 같은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산을 바라본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상처 위에 문신을 새기며 가을은 아주 화려한 성장을 하고 외출을 한다. 나도 따라 나선다. 선비를 상징하는 학은 십장생을 상징하는 소나무에서만 둥지를 튼다는 데 내 둥지는 어찌 되었는지.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목민(牧民)의 방법을 알고 실천한 안철수 의원
  • 대통령 윤석열이여, 더 이상 이재명의 꼼수에 속지 말라
  • 자신의 눈에 있는 '대들보'를 먼저 보라
  • 천하장사, 이봉걸 투병 후원회 동참
  • 세종시(을) 강준현 후보여 떳떳하면 직접 검찰에 고발하라
  • 제22대 총선의 결과와 방향은?
    • 본사 : 세종특별자치시 한누리대로 234 (르네상스 501호)
    • Tel : 044-865-0255
    • Fax : 044-865-0257
    • 서울취재본부 :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2877-12,2층(전원말안길2)
    • Tel : 010-2497-2923
    • 대전본사 : 대전광역시 유성구 계룡로 150번길 63 (201호)
    • Tel : 042-224-5005
    • Fax : 042-224-1199
    • 공주취재본부 : 공주시 관골1길42 2층
    • Tel : 041-881-0255
    • Fax : 041-855-2884
    • 중부취재본부 : 경기도 평택시 현신2길 1-32
    • Tel : 031-618-7323
    • 부산취재본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안로 90-4
    • Tel : 051-531-4476
    • 전북취재본부 : 전북 전주시 완산동 안터5길 22
    • Tel : 063-288-3756
    • 법인명 : (사)한국불우청소년선도회
    • 제호 : 세종TV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세종 아 00072
    • 등록일 : 2012-05-03
    • 발행일 : 2012-05-03
    • 회장 : 김선용
    • 상임부회장 : 신명근
    • 대표이사: 배영래
    • 발행인 : 사)한국불우청소년선도회 대전지부
    • 편집인 : 김용선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선규
    • Copyright © 2024 세종TV.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e129@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