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앉은 하늘이 오늘 하루도 영 글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도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는 잊지 않고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뇌이고 또 뇌어본다.
우리네 인생길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든 가시밭길이라고 하지만 걸어온 인생 여정은 왜 그리도 험난했고 눈물로 얼룩진 한 많은 세월이었던가. 늙은 이발사의 그리움이 해일처럼 일어서는 저녁 무렵 나는 그래도 희망 같은 건 없는가 찾고 또 찾아보지만 좋은 기억은 희미하게 채색되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찢어지게도 가난한 이 땅에 태어나 청초하게 돋아나는 새순 같은 나이에 전쟁이 뭔지 평화가 뭔지도 모른 채, 목숨 건 피난살이로 서러움을 겪었고, 감자밥 고구마밥 시래기죽으로 연명하며 그 지긋지긋한 허기진 보릿고개를 슬픈 운명으로 넘어온 꽃다운 젊은 날들을 돌아보면 굽이굽이 눈물겨운 가시밭길 그 길고도 험난했던 고난의 세월을 어떻게 넘어왔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오늘 점심시간이다. 산행을 마치고 보리밥집에 당도하니 남녀노소 구분 없이 문전성시다. 그 지긋지긋하게 먹던 보리밥이 뭐 그리 그립다고 이리도 많이 몰려 들었다냐?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을 찾기가 어렵다.
지금은 무심한 세월의 파도에 밀려 육신은 이미 여기저기 성한 데 하나 없고, 주변의 지인들은 하나둘씩 사물함 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이때 내 정신도 자꾸만 혼미해져 가는 걸 느낀다. 그래도 지금까지 힘든 세월 잘 견디며 자식들 잘 길러 부모 의무 다하고 무거운 발걸음 이끌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얽매인 삶 다 풀어 놓고 잃어버렸던 내 인생 다시 찾아 남은 세월 후회 없이 살다 가야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해본다.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나가고, 기회가 되면 구두끈 풀었다 묶었다 눈치 보지 말고 ‘오늘 밥값은 내가 낼게.’ 하고 선언하는 삶을 살고 싶다.
황혼에 접어들면 이성의 벽이 허물어지고, 등 뒤에 쌓인 세월의 두께는 닦여지지 않고, 가는 시간 가는 순서도 다 없어지니 남녀 구분 없이 부담 없는 좋은 친구 만나 산이 부르면 산으로 가고, 바다가 손짓하면 바다로 가고, 하고 싶은 취미 생활 마음껏 하며 남은 인생 후회 없이 즐겁게 살다 가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어떤 시인이 말하지 않았는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자기 삶의 이유였던 것, 자기 삶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고 말이다. 많은 나무들이 붉은 빛깔로 곱게 가꾼 열매들을 새들에게 내주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이 다시 사는 길임을 자연과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베풂의 참 의미를 알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삶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누는 것보다 더 풍요로운 삶은 없다는 것을 식물도 동물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 모르는 것 같다.
한 많은(?) 이 세상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없이 훌쩍 떠날 적에 돈도 명예도 사랑도 미움도 가져갈 것 하나 없는 빈손이요, 동행해 줄 사람도 하나 없다.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다 쓰고 쥐꼬리만큼 남은 돈 있으면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다 쓰는 것이 좋다. 행여라도 사랑 때문에 가슴에 묻어둔 아픔이 남아 있다면, 미련 없이 다 떨쳐버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도 없으리라. ‘당신이 있어 나는 참 행복합니다.’라고 진심으로 얘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 남은 인생 건강하게 후회 없이 살다 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래도 향우신종(香雨新種)이라. 향기로운 비가 내리는 날엔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일에도 소홀하면 안 되겠다.’ 생각해 본다.
저작권자 © 세종T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