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 어느 가게 앞에서 우리를 앞섰던 숙장님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세민숙(世民塾)생 열 한사람을 데리고 일요일 새벽 4시에 대전의 명산 보문산 시루봉 오르기를 몇 년째 해오고 있었다. 그가 창립한 세민숙은 일본의 유신시대 선각자를 양성한 요시따 쇼잉(吉田松陰)의 마쓰시따손주꾸(松下村塾)처럼 ‘호연지기’와 ‘역발산기개세’를 심화하는 교육현장이었다.
라디오방송에 귀를 기우린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게다. 어린 숙생들은 무슨 뜻인지 언뜻 알아차리지 못했다. 6.25사변이 터졌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점심 먹는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이날 새벽 우리가 어둠을 헤치며 산에 오를 무렵에 북한군이 탱크를 몰고 38선을 넘어 남하했다는 것이다.
뉴스방송만이 요란해진 게 아니었다. 휴가 중인 군인은 시급히 소속부대로 복귀하라는 확성기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지프차가 시가지를 돌며 다급한 목소리로 방송을 해댔다. 놀란 시민들이 어리둥절한 채 길에 발이 붙어버린 모습으로 어이없어 했다. 그건 난데없는 거짓선동으로 들릴 정도로 믿기지 않은 사건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학기에 일본군이 진주만습격감행을 알렸던 때에는 너무 어려서 뭐가 뭔지 알 턱이 없었다. 고등학교 입학식을 치룬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생긴 이 전쟁소식은 정말 뭐가 뭔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다. 목을 넘어가는 밥알이 미워질 지경이었다. 어렴풋이나마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기 어려웠기에 더욱 아리송했던 것이다.
중학생 시절에 간혹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고함치며 멱살잡이 하던 광경이 갑자기 눈앞을 가렸다. 그게 좌우익의 싸움질이라는 것이었다는 걸 나중에 선배들한테서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학교 안에서 선생들만이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런 패거리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기숙사에서도 하숙집에서도 테러가 자행되고 밤길에 급습을 당하는 사례도 전해졌다.
당시는 안 호상 박사라는 분이 문교부장관으로 일민주의(一民主義)라는 걸 내세워 교육철학적 정치이념을 설득하는 게제였기도 하다. 그러가하면 전국학생연맹이라는 좌경단체에 맞선 전국학생연합이 학교마다 조직되어 혼란상을 키우던 때이기도 하다. 반공과 멸공을 국시처럼 떠받들며 공산당타도를 외치던 참이었다. 반공통일을 지향한 게 국가정책이었던 것이다.
중학교 5, 6학년생들은 다 큰 사람들이고 일찍이 장가를 든 사람도 있었던 만큼 그런가 보다 하고 짐작할 뿐이었지만 미처 그 진상을 알지 못한 애송이 저학년 학생이야 진정 뭘 그리 수월하게 큰 사람들 짓거리를 알리가 있었겠나. 그냥 어른들 하는 짓이 그런가 보다 하고 눈망울만 껌벅이고 있을 따름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참에 터진 게 바로 ‘6.25사변’이다. 북괴의 침공은 신속한 전진일변도였다. 불과 이틀 만에 서울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정부는 대전으로 옮겨오면서 한강다리도 부숴버렸다. 어디론가 도망갈 생각에 여념이 없는 시민들은 마냥 우왕좌왕했다. 내 선친은 당신의 고향으로 가재 일부를 소달구지에 실려 보냈다.
두 분 큰댁에 맡기는 살림살이는 달구지 석 대로 옮겨졌다. 시골이라는 산 밑 마을이 그래도 난리를 피하는 데 괜찮다고 여겼던 터라 그랬던 것 같다. 어머니를 졸라서 어렵사리 사서 읽었던 책이나 교과서와 일기장 등도 함께 실어갔다. 그 물건은 그러나 주인에게 되돌아오지 못 하고 말았다. 시골 부엌의 불쏘시개와 측간(廁間)의 밑 닦기로 쓰여 없어졌다.
거기에는 오매불망 지금도 아깝고 아쉬운 책이 적지 않다. 김기림의『시론』과 윤 곤강의 『시와 진실』은 못내 그리운 장서이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기영의『민족의 비원』은 좌경색갈이 강하게 들어 있어 동심에 상처를 준 서적이지만 잊혀지지 않는다. 조숙한 독서열은 진보적인 지식인 어른들이 독파했다는 일본경제전집의『자본주의론』도 빌렸다가 함께 일실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기에 6.25라는 그 난리 통에 본의 아니게 겪었던 고통과 더불어 몹쓸 놈의 공산당에 대한 악의적이고도 도발적이며 복수살인적 감정이 솟구치는 현실을 억지하기가 힘들다. 동족상잔이라는 어휘 자체가 증오심을 북돋우며 ‘우리민족끼리’라는 꾀임수 작태가 되레 살기를 불러일으킬까 두렵다. 그래, ‘끼리끼리’를 입에 달고 지껄이는데 대체 뭘 하자는 건가.
‘우리민족’이란 게 도시 무언가 묻고 싶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걸 들먹거리자는 것인가. ‘홍익인간’이라는 허구를 내걸자는 건가. 어미를 곰으로 둔 처지라고 배웠는데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면서 떠드는 품이 ’ㄸ ㅗ ㅇ'끼리 뭉치자는 건가. 그렇다면 구더기만 쌓이는데 뭬 그런 게 쓸모 있단 말인가. 요즈음은 ‘글로벌’에다 ‘멀티’가 판을 치는 세월이다.
난리부산 그만 떨고 속 차리는 게 슬기로운 것이다. 괜스레 이 난리 통에 뭘 얻어 보자고 쥐어짜고 비틀고 있는가. 6.25는 사변이고 정말 끼리끼리 싸움질한 게 아니냐. 누군가는 ‘한국전쟁’이랍시고 업그레이드 레이블을 부치고 또 어떤 위인은 ‘코리언 워’라고 신분상승을 외쳐댄다. 웃긴다. 그 난리는 ‘난리’였다 분명히. 하나의 ‘사변’인 것이다. 잊지 말자 동족상잔을.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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