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겪는 일은 쉽사리 잊어지는 게 아니라 싫어도 아니,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날의 회상을 막을 수가 없다. 서울 쪽에서 밀려 내려오는 피난대열의 처량한 군상에 상심한 선친은 우선 가까운 시골로 잠시 몸을 피하자는 제안을 하셨다. 약체인 어머니는 먼 길 떠나는 게 겁나서 남편의 의견을 곧장 받아들였다.
남침 열흘쯤이 지나서 아침밥을 서둘러 먹고 네 식구가 짐을 꾸려 집에서 불과 30리길의 지량리(芝良里)라는 곳으로 떠났다. 무지막지한 탱크가 천하무적인 듯 남하하고 있다는 소문에 놀란 가슴이지만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 것이다. 정전이 되기까지 3년이라는 세월이 걸릴 줄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 식구와 동행을 자청한 이웃들과의 피난길은 아마도 피크닉이라도 가는 듯한 행색이었을 게다. 선친이 화려했던 사업을 접고 나서 소일삼아 물고기 잡이를 즐겨 다니던 고장이 행선지였기에 금방이라도 귀가할 수 있을 거라는 소망을 지닌 채 걸음을 재촉했다. 거기 이장 댁이 숙소였다. 불과 10여 가구가 넉넉지 못 한 살림을 해가는 촌락이었다. 순박한 마을이었다.
동네 앞개울에는 인천에서 이동해온 경찰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모래바닥에 조그마한 천막 두 개를 쳐놓고 경찰관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집집마다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굴뚝을 벗어나는 정경은 매우 시적이었다. 낭만적인 동양화 소재가 될 만한 풍경이었다. 동네 형뻘 되는 대학생과 등목을 하고자 냇가로 내려갔다. 짐을 지고 오느라 땀이 많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아뿔사! 이 장면은 그러나 아름다운 저녁노을의 그림이 아니었다. 평화로운 농촌의 좋은 인심은 없었다. 사건이 터진 것이다. 까까머리 고교 1학년생의 두상(頭狀)이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패잔병 신세의 경찰관들은 진짜 패배의식에 찌들어 있어 박박 깎은 고교생의 두발이 그들의 눈에는 영락없는 인민군 간나 새끼들의 그것으로 보였던 게 틀림없다. 어리디 어린 인민군의 삭발두상에 혼비백산한 인천경찰관들의 눈에 금방 불이 붙고 말았다.
냇물에 몸을 씻을 양으로 웃통을 벗으려는 데 경찰관 한 사람이 갑자기 뛰어 덤빈다. 다짜고짜 ‘너 신분증 내놔!’하고 고함치는 것이다. 대전고등학교 학생이라고 신원을 밝혀도 막무가내로 딴전을 부린다. “너 인민군이지, 임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기가 막혔다. 옆의 대학생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형뻘되는 대학생이 “쟤는 고교생이요. 내 동네 사는 동생이요”라고 이른바 인우증명을 해도 일찌감치 인민군한테 혼쭐이 나서 도망 온 인천서 경찰관의 겁먹은 이성은 갈피를 잡지 못 한다. 학생증을 집에 놓고 온 불찰이 마침내 인민군으로 오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난리 통에 깜빡한 실수는 그날 밤이 새도록 뭇매질을 당하는 고문에 평생의 응혈을 만들고 말았다.
이장의 신원보증도 별무 소용이었다. 전시상황에서는 논리도 논증도 물론 쓸모가 없다. 인정사정이 통할리 없는 게 전장이 아닌가. 빼어난 재주도 뛰어난 완력도 무용지물이다. 따질 겨를이 없는 게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즉결처분 받는 상황에서는 그의 처 엘레나가 힘없는 자기들을 묶지 말라고 애원해야 소용없듯이 여기 냇가에서도 무슨 말이든 패잔경찰관들에게는 마이동풍이요 우이독경이었다. 놀란 토끼들이었으니까.
멀리 남쪽으로 훌쩍 떠나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대구 부산방면으로 무작정 달려가지 못한 탓에 인민군으로 오인 사살될 뻔한 위험과 불안과 공포는 평생을 두고 이너 챔버에 숨어있다. 그것은 빨갱이가 저지른 끼리끼리의 싸움이자 6.25사변이라는 난리가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소년의 의식을 더없이 전율케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비극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도망병 신세의 어리석은 경찰관이 후려갈긴 매질에도 진실은 살아서 명문고교의 학생을 보호했다. 그가 지금도 좌빨을 증오하는 연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NLL을 바꿔야 한다면서 이 문제에 대해 김정일이 하고 인식을 같이 한다고 말한 위인의 적성요소가 무슨 바위엔가 부딪치는 해프닝 같은 게 곧 이 난리 통에 생긴 ‘부조리 무조리 옹조리’가 아닌가.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