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이 땅에서 숨을 고르던 참이라 ‘순사’라는 용어가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패잔병 신세의 경찰관들, 순사들은 말 그대로 밤새도록 어린 학생을 들볶아댔다. 오죽 못 났으면 총 한방 쏴보지도 못 한 채 허겁지겁 기어온 주제였기에 그들의 무지막지한 매질은 자기들의 스트레스 해소작업이었을 게다.
날이 밝자 이장과 동네 유지들의 요청으로 파김치가 된 학생은 가까운 파출소에 인계되었다. 학생의 신원사항을 면접과정에서 자세히 경청한 파출소 주임은 놀래는 눈치였다. 금세 조용한 옆방의 의자를 내주고 위로의 말까지 건네주었다. 그의 전갈을 받은 아버지가 달려오셨다. 아버지와 함께 근처의 몇 분 어른들이 이 엉뚱한 사건에 대한 인천경찰관들의 깎듯한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 무렵 아버지의 선성(先聲)은 광역 수렴되고 있었다. 광복 후 집의 지하실에 돈이 썩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강도가 들었을 때 싸움 끝에 쫓아내기도 한 무용담만이 아니라 2백여 평이나 되는 마당과 흔치 않은 와가(瓦家) 두 채가 빈촌이다 싶은 주변사정에서는 주목의 대상이었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고 위해주는 아버지의 친교성과 박애정신이 얻은 지인이 그래서 부지기수였다. 파출소를 나와 아버지와 형우제공하는 부자 어른의 자가용 나귀를 타고 귀가했다.
어쨌거나 당시의 ‘잔인한 6월’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일대 춘사(椿事)였던 건 역사의 증언이다. 그건 명문 대전고 학생에게도 매한가지 대책(大責)감이었다. 하필이면 비굴하기 짝이 없는 ‘순사’와 마주친 자리가 우연치고는 너무나 염치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즐겨 찾은 동네 앞개울이 아들에게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악몽의 현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공산당 놈들의 난리 통에 생긴 단테의 ‘신곡(神曲)’ 속 지옥편(inferno)이었던 셈이다.
하늘의 저주를 받을 미친놈의 랩소디(rhapsody)는 얼마 뒤 대전을 인민군의 손아귀에 넣어주었다. 금강방어선이 무너지고 이승만 대통령이 임시수도 대전을 버리고 떠나자 중앙시장이 불타는 불행과 더불어 서대전에 위치한 고교생의 덩치 큰 집은 인민군 중대본부로 둔갑했다. 넓은 마당에는 탱크 한 대와 백마 한 필이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대청마루는 인민군 장교들의 사무실로 바뀌었다.
이에 앞서 학생의 부모와 누이동생은 서둘러 외가의 친척댁으로 피신했었다. 세민숙의 정기와 기질을 몸에 익힌 고교생은 ‘내 잡 지키기’를 자청했다. 그는 외롭지 않았다. 숙장이 가까이에서 식사문제를 챙겨주고 피난 간 뒷집이 비어 있어 잠자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직은 혼자 감당하기 쉽지 않은 가사를 웬만큼 자력해결하면서 ‘내 집 지키기’를 마음먹은 터에 그냥 눌러 있었던 것이다.
학생은 인민군장교들의 얄미운 행태를 가끔 투정하며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기도 했다. 그건 어쩌면 진짜 그 나름의 카프리치오(capriccio)였다. 무식한 장교들은 명문고교생과의 대면담론에서는 늘 판정패를 자인했다. 서로의 나이도 크게 다르지 않기에 때로는 친교하는 젊은이들의 말씨름으로 여겨지는 광경이 되기도 했다. 결코 세뇌되지 않는 학생에게 장교들은 예우태도를 아끼지 않았다. 학생의 투지가 승리했던 것이다.
어언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릴 즈음 갑자기 인민군 중대본부가 어딘가로 이동했다. 집안이 아수라장이었지만 이내 제 모습을 갖추었다. 동네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이윽고 멀리 떠나 있던 부모가 귀가하고 당분간 영일(寧日)이 이어졌다. 학생의 네 식구가 모처럼 달밤을 즐기며 전란이면서도 그나마 오붓한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노란 ‘긴마까 참외’를 먹으며 피난처 얘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난데없이 대문을 두드려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핫바지 차림의 건장한 청년 넷과 정장에 무장한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앞장선 ‘만덕’이는 좀 ‘덜 떨어진’ 동네 청년으로 아버지 친구의 아들이다. 이놈의 손에 들린 ‘따콩총’과 내무소장이라는 애송이 인민군의 권총이 전쟁이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를 ‘악질 지주 놈’으로 몰아치면서 마당 끝 전주의 늘어진 전깃줄을 가지고 다섯 놈이 함께 속옷만 입은 아버지의 몸을 사정없이 포박하는 것이었다.
날벼락이었다. 악질 지주라는 지칭이 난무하는 가운데 마치 ‘미아리 고개’의 가요곡 내용처럼 아버지는 꽁꽁 묶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고향의 소작농 아들이라는 녀석들이 저승사자로 온 것이다. 이에 학생의 울분과 투지는 책임자 인민군에게 멱살잡이로 덤벼들었다. 혼비백산한 그 놈은 권총을 학생의 배에 들이댄다. “이 간나 새끼 무에 . . . ”라는 순간에 다시금 양발치기를 감행하는 학생의 당돌성에 놈들 모두가 순간적으로 멈칫한다. 죽기 살기였다. 아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던가.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