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난리 통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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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난리 통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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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7.1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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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너무나 뜻밖이었다. 깜짝 놀랐다. 아주머니의 귓속말은 경천동지할 소식이었다. 아버지가 복숭아 과수원 근처의 동굴 속에 숨어 계신다는 전갈이다. 도대체 어찌 된 것인가. 어젯밤 끌려가신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니. 살이 부들부들 떨린다. 아직도 잠결인가 싶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혼자만 알고 처신하라는 아주머니의 말이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버지가 그렇게 당부하셨다는 게다. 어머니에게 서둘러 발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놀라 자칫 경기라도 일으킬까 걱정하신 모양이다. 그렇다. 아들은 어려도 믿음직했나 보다. 내무소장과 맞장을 뜰만큼 사내구실을 한 걸 믿으신 게다. 뜬눈으로 새운 밤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아들은 허둥대기 십상인 판이지만 바짝 정신을 차렸다. 입술을 악다물었다.
 
아버지가 주문하신 물건을 챙겨야 한다. 부엌에서 하염없이 아침밥을 짓고 계신 어머니가 눈치 채지 않게 살짝 안방으로 들어갔다. 장롱에서 아버지의 옷가지를 찾았다. 서둘러 보자기를 들고 집을 나섰다. 누이동생은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어머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 옆으로 나있는 호남선 철길이 과수원으로 가는 통로이다. 걸음을 재촉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파놓은 동굴 몇 개가 있었다. 과수원 앞 철길 옆의 공터에 자리하고 있다. 어려서 동네 친구들과 장난치며 가끔 드나들던 곳이다. 조차장 터를 닦느라 파놓은 것인가 싶었던 동굴이다. 두 번째 굴 안으로 들어가며 헛기침을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여기다라고 아버지가 응답하셨다. 반가움에 눈물이 쏟아졌다. 가까스로 아버지 곁으로 달려가 보자기를 건넸다.
 
보자기를 받는 아버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손만이 아니다. 온몸을 떨고 계셨다. 아직 벼가 패지 않은 계절이지만 새벽녘에는 한기를 느끼는 기온이다. 8월 중순의 동굴 안 공기는 바깥에서 보다 더 서늘했다. 아버지가 물에 흠뻑 젖은 러닝셔츠와 팬티를 새 것으로 갈아입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다시금 눈물이 쏟아진다.
 
어린 소견으로도 아버지가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게 무척 대견스러웠다. 무조건 좋았다. 영문이야 어떻든 상관이 없다. 무지막지한 시골 농부인 인민위원 멍청이들을 어떻게 따돌리고 여기에 와 계시는지 여간 궁금한 게 아니다. 그러거늘 겉옷까지 다 갈아입으신 아버지는 아들의 궁금증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 당신의 처외가 댁이 있는 곳으로 떠나겠다고 하신다.
 
밤사이에 일어난 일이 알고 싶은 아들의 마음을 헤아릴 겨를이 없을 거라는 짐작만 한 채 뒤를 따르는 아들에게 동굴 입구에 이르자 사방을 둘러본 아버지가 아주 짤막하게 일러주신다. 어젯밤 느지막에 유성에서 놈들을 따돌리고 새벽에 이곳으로 와 숨었다는 것이다. 도망해온 과정은 한참 뒷날에야 듣게 된다. 진짜 서바이벌 게임이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묶여 가면서 아버지는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으셨단다. 고향(지금의 지족동)에 당도하면 필경 놈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게다. 제 놈들의 애비 모두가 애원복걸해서 허락한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는데 이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꼴이 되는 마당이 아니겠는가 싶었다는 것이다. 못난 놈은 잘난 놈 미워하고 못 사는 놈은 잘 사는 놈 죽이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현실인식이 아버지의 마음을 단단하게 죄였단다.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도로는 지금의 시청 근처에서 가파른 언덕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느릿느릿 걸었다. 망나니 인민위원들 가운데 그래도 착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먼 길이니 쉬엄쉬엄 가자며 아버지를 놈들과 뒤처지게 했단다. 자기가 감시를 독차지하겠다고 자원했다는 것이다. 그는 할아버지 친구의 아들이었다.
 
어느 중학교 서무과 직원으로 공무원이었던 그는 놈들한테 끌려 다니는 참이었다. 아버지와의 면식이 없던 그는 아버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 부득이 따라온 처지이지만 놈들이 악행을 저지를 것을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인민재판에 넘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어떻게든 살려낼 궁리를 했었다는 회고담을 나중에 자세히 듣게 된다.
 
이윽고 만년교에 다다랐다. 여기를 지나 유성온천 네거리까지의 사이에 주막이 한 군데 있었다. 고향 가는 길에 아버지가 가끔 들르던 술집이다. 당시에는 버스가 하루에 겨우 두 번만 다니는 길이라서 사람들은 으레 달구지를 몰거나 도보로 다니기 일쑤였다. 술을 즐기시는 아버지는 이 주막이 친근한 휴식처였다. 여기가 바로 난리 통에 생명을 구해준 운명의 현장이다.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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