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난리 통에(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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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난리 통에(6)
  •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7.2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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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유성온천은 역사가 꽤 길다. 1920년대에 현대식 온천으로 개발되었다. 지금은 과학특구의 면모를 갖춘 온천도시이다. 백제시대에 이곳의 노천 분출수로 상처를 씻으면 치유됐다는 전설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왕도 후보지(신도안)를 답사하고 잠시 머물기도 한 곳이다. 아버지에게 ‘운명의 현장’이었던 주막은 한때 군인휴양소로 역대 대통령들이 자주 들렀던 ‘계룡스파텔’ 통로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6.25 난리 통에는 이 근처가 온통 논이었다. 유성호텔 주위의 온천장 몇 군데가 있었을 뿐 주변일대가 벼농사를 짓는 땅이었다. 대전에서 거둔 인분을 똥통에 담아 달구지에 실어다 농사를 지었다. 그러니 이 주막은 농부들의 유일한 목롯집이요 행인들에게는 주반(酒飯)을 해결해 준 쉼터였다. 아버지는 단골손님이었다. 어쩌면 주모에게는 돈 잘 쓰는 한량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일행이 여기 주막에 당도했다. 급조된 공산당 패거리 무식꾼들에 끌려온 부농지주 아버지는 눈이 번해지는 순간을 맞았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이다. 행여나 하고 진즉에 기대한 바가 있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며기다렸던 참이다. 여기에서 술을 먹고 가자고 제안했다. 십 여리 길을 걸었으니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댔다. 하기야 제 놈들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아버지의 요청을 그냥 외면하기 어려웠을 게 뻔하다.

그건 분명히 행운이다. 그 길이 아니었으면 그런 기회가 주어질리 만무일 게 아닌가. 늦은 밤이라 문을 두드려 주인을 깨웠다. 안면이 두터웠던 주모는 아버지의 음성을 알아차렸다. 막걸리가 한 순배 돌았다. 마지막 술잔을 놓은 아버지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호소한다. 설사변기(泄瀉便氣)가 생겼다는 시늉을 했다. 난리 통의 차디찬 저녁 음식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불학무식한 소작농 자식들이라 역시 놈들도 무식했다. 보고 배운 게 너절한 저급인생이니 대장이라는 녀석이 주청 바닥에다 용변을 하라는 것이다. 그야 제 놈들 입장에서는 그런 처사가 그나마 마땅한 것이라고 여겼을 게다. 기왕에 죽일 마당에 무슨 체면치레가 필요할 것인가. 저네 성깔대로라면 당장 발길질을 해도 상관없는 게제에 용변이 대수로운 게냐고 생각할 만도 하다. 개 목숨인들 그러랴 만은 당장 그들의 위세는 ‘내 맘대로’인 것이다.

아버지의 재치있는 연기는 놈들의 안하무인 위세에 잠시 머뭇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놈들의 무자비한 태도를 누그러뜨릴 재주를 찾았다. 아무리 죽을 몸이지만 ‘내 체통’을 조금이나마 살펴달라고 애원하는 시늉을 했다. 더구나 여자 주모 앞에서 망측스런 모습은 보일 수 없다고 강변한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주객(主客)이 되었던 여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잖느냐고 얼러대기까지 했단다.

그 순간 홍씨 청년이 거들었다. 놈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주청 밖으로 나가 용변하라고 명령했다. 졸개들 집단이니 명령주체의 위엄이 설 리가 없다. 게다가 산전수전 다 겪은 주모도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여기가 어디라고 주청 안에다 “똥을 누라”고 하느냐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운명적인 찰라가 아닌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버지는 밖으로 뛰쳐나오셨다. 주막의 출입문을 열어젖혔다.

    

한 놈이 뒤따라 나왔다. 문 가까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 자리에서 용변을 보라고 한다. 팬티 끈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심정은 착잡했다. 도망자의 희망이 날아가는 두려움이 몰아친다. 마지못해 끌어내린 팬티를 엉거주춤 붙잡은 채 쪼그리고 앉는 시늉을 한다. 감시자의 눈을 속이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안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놔두고 들어와 술을 들자는 소리였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소리인가. 안으로 들어가는 놈의 뒤통수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단다. 걸음아 날 살려라가 발동했다. 아버지는 재빨리 허리춤 크기가 된 벼논으로 뛰어들었다. 몸을 굽히고 마구 뛰었다. 뛰고 또 뛰었단다. 두 다리는 그러나 급한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벼가 걸림돌이었다. 자꾸만 걸리적거렸다. 숨까지 차오른다. 죽자사자 뛰는 데도 나아가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던 게다. 혼자 마음만 내달렸던 것이다.

실제로 얼마나 달렸는지 가늠조차 어려운 판이다. 웬만큼 뛰어온 줄 알고 뒤돌아보니 실상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였단다. 아버지는 스스로 놀라고 따분해졌다. 그 순간 따콩총이 터졌다. 놈들이 몰려 나와 우왕좌왕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다. 허리를 굽혔다. 바짝 엎드렸다. 들키면 끝장이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움직이면 벼가 흔들릴까 마음 조리며 그 자리에서 동작을 멈췄다. 꼼짝할 수 없었단다. 너무나 숨 막히는 장면이 아닌가.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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