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난리 통에(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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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난리 통에(8)
  • 윤기한
  • 승인 2013.08.1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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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뛰면서 생각했다. 생각해서 뛰는 게 아니다.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선 뛰고 봐야 한다. 달아나기에 급하다. 놈들이 뒤좇아 올까 겁이 난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더 힘껏 달렸다. 당장은 뭐가 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냥 뛰는 것이다. 좁아터진 논두렁은 허물거리고 가장자리 콩대마저 거리낀다. 호사다마인가. 그런 장애물의 방해가 있어도 막무가내로 뛰었다. 종아리가 따가운 것도 한참 뒤에야 느꼈다고 한다.

숨이 차오른다. 어지간히 뛰어온 게다. 꽤 멀리 달려온 터라 숨이 찰 수밖에 없다. 잠시라도 숨 돌릴 여유를 갖고 싶어진다. 돌아다보니 주막이 저만치 멀리에 있다. 유성천을 거슬러 내 집 방향인 가수원 쪽으로 올라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았다. 다리의 힘도 빠졌지만 놈들에게서 웬만큼 떨어져 있다는 안도감이 휩쓴 것이다. 목이 마르다. 긴장과 초조와 흥분이 갈증을 가중시킨 탓이다.
 
지금 앉은 자리가 유성천 냇둑이다. 몇 걸음 뚝 밑으로 내려갔다. 야트막하게 흐르는 냇물에 코를 대고 실컷 들이마셨다. 물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니 금세 기운이 몇 배나 커진 기분이 들었다. 짧고도 짜릿한 휴식이 꿀맛 같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다시 뜀박질을 서둘렀다. 도망자는 쫓기는 처지에 있다. 순식간에 사태가 반전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한 아버지는 이제 마구 뛰지는 않았어도 걸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놈들의 추격은 없었다. 천운이다. 조상의 음덕이라 감사하면서 다다른 곳이 가수원 다리이다. 그 밑에는 사람들이 노닐던 공간이 있었다. 작은 멍석이 깔려있다. 낮에 모여 노느라 펴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으레 다리 밑은 노숙자나 노약자의 온상이 아니던가. 아버지도 유혹에 빠졌다. 쉬었다 가자는 마음이 쏠려 자리바닥에 몸을 던졌다.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의 충동이었던 게다.
 
으스스 한기가 들었다. 눈을 떴다. 잠이 들었던 것이다. 스스로 놀랬다. 어슴푸레한 둘레를 살폈다. 혼자라는 사실에 다시 놀란다. 놈들에게 잡혀 있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자 되레 몸이 떨린다. 두렵거나 무서워 그런 게 아니다. 전율이 아니다. 흥분이다. 너무나 고맙고 좋아서 그런 게다. 전에 없이 천지신명을 찾으며 감사했다. 아버지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 자기 신념이 과분할 정도로 강렬했던 분이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 자유로운 몸이 된 현실에 감루하고 만다. 그러면서 단말마 지경에서 살아난 자신이 대견스레 생각되었다. 정신 차리자고 다짐한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뭇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놈들이 나를 아주 포기하고 돌아갔을 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틀림없이 내 집 근처 어디에선가 그들이 감시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놓친 게 분해서도 되돌아와 집 주위를 맴돌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런 생각은 아예 접었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 집으로 불쑥 찾아가서도 안 된다. 놈들이 지인 쪽에도 염탐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보다 더 걱정이 되는 건 사람을 믿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 난리 통에 사람이 어떻게 변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난리는 세상을 어지럽히기 일쑤가 아닌가. 친구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난리가 사람을 못 믿게 만드는 탓에 그런 게다. 터무니없는 일이 생기기 십상인 게 난리 통이 아닌가. 그래서 어느 누구의 집으로 가야할지 막막해진다.
 
저희들을 먹여 키운 아비들이 애지중지하며 농사를 지었던 땅 주인을 잡아다 인민재판에 부쳐 죽이겠다는 판인데 믿을 사람이 누구인가. 먹고 살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던 제 아비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간다. 소작료를 깎아 주기라도 하면 허리를 굽실거리며 고마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환상이 확 달려든다. 갑자기 따분해진다. 어지럽다. 거기에 새벽녘 이슬이 몸을 휘감는다. 다리 힘도 빠진다. 풀밭에 쓰러졌다.
 
아찔한 순간이다. 이런 때 인간은 강해진다. 생각지도 않은 힘이 솟는다. 막다른 골목에서 도망자에게 피어나는 기지와 마찬가지로 생 기운이 나는 것이다. 아버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여기가 어디인데. 무슨 일이 금방이라도 닥쳐올지 누가 아나. 오로지 달아나야한다. 당장에. 그 일념만이 있을 뿐이다. 어떠한 핑계도 무용지물이다. 도망자의 목표는 되도록 ‘멀리멀리’에 있다. 아버지는 무작정 멀리로 가는 이정표를 그렸다.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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