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난리 통에(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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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난리 통에(9)
  • 윤기한
  • 승인 2013.08.1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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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다가오느라 밤이슬이 내린다. 이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뛸 만큼 다급한 지경은 아니다. 지금쯤 놈들이 뒤를 좇을 엄두를 내기 어려운 걸 확신한 아버지는 마음이야 급하지만 뜀박질은 잠시 거두었다. 찬 기운이 도는 밤길이라 숨도 차오르고 앞일을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는 생각에 걸음이 늦어진다. 더구나 소매 없는 러닝셔츠에 면 팬티 차림이라 냉기가 너무 서늘하게 느껴진다. 조금은 여유가 생긴 탓이기도 했을 게다.

 
그래도 공포감을 아주 떨쳐버리기 어렵다. 잰걸음으로 가수원 다리를 지난다. 금강방어선의 지류를 지키던 미군이 많이 죽은 곳이다. 인민군이 대전을 포위해 진입한 장소이다. 여기에서 산을 넘어 동쪽으로 가면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에 이른다. 보문산 서쪽 후면이기에 대전진격의 주요 작전지역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 지형에 너무나 익숙해 있어서 되레 이곳을 피했다. 그래서 택한 길이 근처를 달리고 있는 호남선 철로였다.
 
철길은 걷기에 편하다. 침목과 자갈이 철선 레일을 받치고 있는 철길 양편의 평지는 잘 다져진 공간이라 울퉁불퉁 꼬불꼬불한 논길보다 몇 갑절 좋다. 이 철길을 따라 서대전역 근처에 이르면 내 집이 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마냥 철길을 따라가야 할 건가. 아니다. 그건 “날 잡아 가슈”가 되기 때문이다. 집으로 간다는 발상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철길은 전라도 진산면으로부터 흘러오는 유등천을 가로질러야한다. 긴 철교가 놓여있다.
 
이 철교는 ‘공글다리’라고 불렸다. 아마도 콘크리트라는 영어를 일본어 발음형태로 부른 탓에 그리 되었을 게다. 어쨌거나 이 철교에 다다른 아버지는 조심스레 침목을 하나하나 건너오면서 일단의 작심을 하게 된다. 거기에서 몇 백 미터 앞에 있는 복숭아 과수원을 목표로 삼았다. 막역한 우정관계를 유지해온 대한청년단장의 과수원이다. 보문산 기슭에 자리한 과수원 몇 군데와 드문드문 농가가 있는 곳이라서 사람들의 눈에 띌 위험이 적다.
 
게다가 동네 아래쪽 철길 옆으로 길게 뻗어 있는 신작로 끝에는 기차 조차장 건립예정지가 있다. 근방에는 일제가 준비한 방공호 겸용의 토굴 서너 개가 있다. 아버지는 피신하기에 최적의 장소를 기억해 낸 것이다. 단장부인에게 저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구원을 요청할 참이다. 신뢰할만한 부인네이고 자별하게 지내온 부군과의 우정을 살려 비밀을 지켜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무작정 과수원 사립문을 열어 젖혔다.
 
아무리 난리 통이지만 남녀가 유별한 세월이다. 아버지의 몰골은 초라하고 사나웠다. 그러니 대단한 실례이다. 더구나 새벽녘에 느닷없이 찾아들었으니 염치코치 다 버린 셈이다. 그러나 어쩌랴.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겨우겨우 당도하고 보니 체면불고가 아니겠는가. 자초지종을 자세히 듣지 않고도 단장의 부인은 금세 사정을 알아차리고 숨을 곳을 마련하는 게 급하다고 서둔다. 몇 마디 부탁의 말을 뒤로 하고 아버지는 토굴로 들어갔다.
 
먼동이 트이기 얼마 전이다. 주변이 희부옇게 새벽빛을 밀고 온다. 아버지는 하마 사람들에게 들킬세라 종종걸음을 쳤다. 토굴 속은 아직도 컴컴하다. 케케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몇 걸음 들어서니 바깥보다 한결 더 서늘하다. 어둡기도 하거니와 한 번도 전에 들어온 적이 없어서 조심스러워진다. 어디까지 들어 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들어가 보는 게다. 모험 좋아하는 어린 아이가 된 게다. 눈먼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벽을 더듬어 본다.
 
흙벽에 물기가 잡힌다. 바닥도 약간 진득거린다. 맨발이라서 미끄러질 것 같다. 그나마 비스듬히 굽어있다. 직선으로 뚫린 굴이 아니다. 정말 아리송하고 따분하다. 완전히 맹인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이마에 뭔가 걸리는 듯하다. 거미줄이다. 손바닥에 잡힌 게 뭔지 분간이 되지 않는 바람에 무작정 바닥에 던지고 발로 뭉갰다. 한마디로 으스스하다. 고딕소설의 한 장면 같았을 게 분명하다. 아버지는 토굴 끝에 이르렀다.
 
이런 때도 ‘진인사대천명’이 해당되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다리 힘이 빠지는 걸 알았다. 축축한 바닥이지만 주저앉았다. 서 있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흔한 말로 ‘맥 풀린’ 찰나인 게다. 만사휴의라서가 아니라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천신만고의 극복’에서 얻은 릴랙스(relax)이다. 어림짐작컨대 20미터가 넘는 토굴이다. 말하자면 토굴의 ‘막장’에 와 있는 아버지는 지금 이 자리가 어제 밤의 단말마 같은 생지옥의 ‘막장’이 아니기를 바랬다.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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