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문학> 갓지 못한 것을 탐하는 갈망의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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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문학> 갓지 못한 것을 탐하는 갈망의 이름이여
  • 금강일보
  • 승인 2012.05.1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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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는 영화로 먼저 접하게 된 이 작품의 어렴풋한 줄거리를 들었을 때 ‘은교’라는 제목은 ‘隱交’, 즉 ‘은밀한 교류’, ‘은밀한 교제’, ‘은밀한 교감’ 등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위대한 시인의 세계를 동경한 열일곱 소녀 한은교, 그녀의 싱그러운 젊음과 관능에 매혹당한 시인 이적요, 스승의 천재적인 재능을 질투한 패기 넘치는 제자 서지우….

최근 동명 제목의 영화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충남 논산이 낳은 글쟁이 박범신의 장편소설 ‘은교’(문학동네)는 서로 갖지 못한 것을 탐하는 세 사람의 질투와 매혹을 통해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들여다본다.

◆이적요와 서지우, 그리고 은교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받던 이적요가 죽은 지 1년, Q변호사는 유언에 따라 그가 남긴 노트를 공개하기로 한다. 하지만 노트에는 이적요가 열일곱 소녀인 한은교를 사랑했으며 제자였던 베스트셀러 ‘심장’의 작가 서지우를 죽였고, ‘심장’을 비롯한 서지우의 모든 작품을 이적요가 썼다는 충격적인 고백이 담겨 있다.

이적요 기념관 설립이 한창인 시점에 공개를 망설이던 Q변호사는 은교를 만나고, 서지우 역시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듣는다. 은교에게서 서지우의 디스켓을 받은 Q변호사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기록을 통해 그들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알게 된다.

이적요는 자신의 늙음과 대비되는 은교의 젊음을 보며 관능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자신을 “할아부지”라고 부르며 유리창을 뽀드득 소리 나게 닦는 은교의 발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청춘을 실감한다.

정에 넘치던 사제지간이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는 은교를 둘러싸고 조금씩 긴장이 흐르기 시작하고, 열등감과 질투, 모욕이 뒤섞인 채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서지우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이적요는 조금씩 생명력을 잃어간다. 이적요는 정말 서지우를 살해했던 걸까. 이적요는 정말 은교를 사랑했던 걸까.

◆내밀한 욕망과 갈망의 이야기
자신과 대비되는 은교의 젊음을 보며 관능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적요, 그런 이적요의 눈빛을 깨닫고 은교에 대한 집착이 커져가는 서지우.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얽혀 있는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작가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갈망(渴望)’을 이야기하며 남자와 여자, 젊음과 늙음, 시와 소설, 욕망, 죽음 등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이적요를 핑계 대고 자신의 욕망을 투영했다는 작가에게 갈망이란 단순히 열일곱 어린 여자애를 탐하기 위하는 데 쓰이는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 갈망은 이룰 수 없는 것, 특히나 사랑의 갈망은 이미 절망을 안고 있다는 데서 보다 근원적인 어떤 감정이 아닌가 싶다.

◆갈망의 3부작 완성
“지난 십여 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낱말은 ‘갈망’이었다.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이 소설 ‘은교’를 나는 혼잣말로 ‘갈망의 삼부작(三部作)’이라고 부른다.” (작가의 말 중에서)

박범신은 2005년 1월 히말라야 촐라체봉(6440m)에서 조난당했다가 살아 돌아온 산악인 박정헌·최강식 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촐라체’(2008년)에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대동여지도를 만든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김정호의 생애를 그린 ‘고산자(孤山子·2009년)’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情恨)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

이 작품은 평생 원고지를 고집했던 작가가 처음으로 컴퓨터 자판을 사용해 쓴 소설이자 개인 블로그에 연재하면서 한 달 반 만에 완성한 소설이다.

◆박범신은

1946년 논산에서 태어난 박범신은 원광대 국문과 및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며 문단에 등단, 문예지 중심으로 소외된 계층을 다룬 중·단편을 발표해 문제 작가로 주목받았다.

1979년 발표한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과 ‘풀잎처럼 눕다’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70~8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81년 ‘겨울강 하늬바람’으로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고, 이후 빛나는 상상력과 역동적 서사가 어우러진 화려한 문체로 근대화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밀도 있게 그려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영원한 청년 작가’로 불리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던 그는 1993년 돌연 절필(絶筆)을 선언하고 겸허한 자기 성찰과 사유의 시간을 가졌다. 유형(流刑)과도 오랜 고행의 시간 끝에 1996년 ‘문학동네’ 가을호에 중편소설 ‘흰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복귀해 자연과 생명에 관한 묘사, 영혼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지난해 7월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직을 비롯해 맡고 있던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고향 논산으로 홀연히 낙향한 그는 문학에 대한 순정으로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창작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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