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교환의 가치를 매기는 수단이 돈이라는 게 사전적 정의이다. 사회생활의 필수품이라는 것이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속담까지 있다. 돈을 가지고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돈더미 위에 오르고 싶어 한다. 돈방석에 앉아 갖은 욕구를 누리고자 애간장을 태우기 일쑤인 것이다.
오죽하면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천박한 신분의 사람일지라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남들이 귀하게 대접해 준다는 뜻이란다. 옛날에 백정이 상놈의 굴레를 벗기 위해 돈으로 양반의 족보를 사들고 언감생심 대감노릇을 흉내 냈다는 야화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돈을 보면 환장하기 십상인 게 쓸개 없는 인종이요 그게 바로 인중지말(人中之末)이 아닌가 싶다.
하기야 “돈에다 침 뱉는 놈 없다”고 선조들이 갈파한 이치가 다름 아니라 어느 누군들 돈을 보고 돌을 보듯 소흘히 하겠느냐는 속내를 갖는다는 것이다. 돈을 어찌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반어적 표현이다. 비록 돈견(豚犬)이 될지라도, 돈다발에 눌려 죽더라도, 아니 돈독이 올라 돈주머니에 돈수재배(頓首再拜)할지라도 돈타령에 바쁜 게 소인배들의 욕망이 아니냐고 풍자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미국의 80년대 최고 팝 싱어 신디 로퍼(Cyndi Lauper)의 말이 떠오른다. 그녀는 나이 서른다섯에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더 많이 배울수록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했다. 비록 가방끈이 짧았을 때에도 잘 나간 자신이지만 그래도 졸업장을 받고 보니 더욱 신이 나서 한 말이다. 역시 돈을 더 벌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가 한 말대로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의 임금이 그렇지 못 한 사람보다 더 많다. 돈을 더 많이 벌(outearn)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현실은 분명히 그렇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물론 그와 다르지 않다. 교육열이 충천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런 일반론이 비록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갖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숙련된 불루 컬러 근로자나 능숙한 세일즈맨이나 기업의 CEO 들은 대학교수나 전문연구원 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번다. 아니, 두드러진 기량을 지닌 운동선수와 연예인이 다른 어느 누구 보다 더 많이 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현진이 그렇고 싸이가 그렇지 않은가. 머리 터지게 공부한 교수도 코피 터지게 연구한 박사도 그들만큼 벌기는 도저히 어렵다.
그런데 지난달 초 국회 정무위원회가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연봉이 5억원을 넘는 경영진의 소득을 개별공시하라는 것이다. 주요기업의 등기이사 등이 받는 보수는 평균임금 근로자의 몇 십배가 되나 보다. 삼성전자의 등기이사 한 사람이 107억 7500만원의 연봉을 받는데 일반직원의 연봉은 6800만원이란다. 엄청나다.
바위 긁듯 어렵고 힘들게 몇 푼을 버는 민초의 입은 벌어 진 채 닫히지 않는다. 하기야 꽤 오래 전에 국내은행장이 수 십 억원의 연봉을 받고 그 운전기사도 몇 억원의 연봉 수혜자라고 신문이 보도한 적이 있다. 당시 국립대학에 봉직하고 있던 필자는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당신 뒤에 서면 작아지는’ 자신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평생을 한 직장에서 몸 받쳐 일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서 퇴직할 때 받아 든 돈이 겨우 몇 억원에 불과한 평균 봉급자는 이제 한숨만으로 자기 삶을 가다듬는 약자에 머문다. 아무리 돈 가치가 떨어졌어도, 엄청나게 돈이 많아졌다 해도 크게 벌지 못한 신세타령만 하기에는 세월이 아깝다는 소리가 들린다. 부의 양극화를 원망만한들 뭣 하겠느냐는 탄식 아닌가.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