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난리 통에(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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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난리 통에(7)
  • 윤기한
  • 승인 2013.08.0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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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긴박한 경우에는 무상무념(無想無念)이 상책인지도 모른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얻은 아버지의 인생철학이다. 벼논에 엎드린 아버지에게는 어찌 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냥 운명에 내맡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움직이면 들킬 참이니 말이다. 놈들이 각개 방향으로 수색을 시작한다. 두 놈이 북쪽으로 내닫고 다른 두 놈이 길 건너로 달려가는 듯 했다. 대장이란 놈과 홍 씨가 두런거리며 아버지가 숨어 있는 자리 근처를 서성댄다.

흔히 속담을 가볍게 여긴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속설이기에 그리 생각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그 격언이나 잠언은 경험철학이 소중히 내려준 진리이다. 우리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그렇다. 지금 아버지가 바로 그 격언의 은혜를 입고 있다. 주막에서 겨우 10여 미터 되는 곳이기에 등잔 밑이 된 게다. 웬만큼 멀리로 도망쳤으리라는 짐작에 놈들은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것이다. 그야 물론 도망자는 으레 죽을힘을 다해 뛰었을 거라 믿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용케도 그날 밤 아버지에게는 ‘대박’이 터진 셈이다. 대통운수의 밤이었던 게다. 달무리에 사방이 꽤 어두웠다. 주막의 촉수 얕은 백열등이 외로운 등대처럼 둘레를 희미하게 밝혀 주고 있을 뿐이었다. 가로등이나 CCTV가 없던 시절이다. 그러니 “날 살려라”하고 뜀박질을 해댔을 도망자에게 이 보다 더 큰 행운이 달리 있었을 리가 없다. 비록 그러지는 못 했지만 아버지의 숨바꼭질은 대성공이었다. 저 밤하늘의 착한 별들이 아버지의 은신처를 일러 줄 턱도 없으니 참으로 복 터진 게 아닌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는 지금 이 자리가 생지옥이었다. 지옥이 따로 있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이름 모를 벌레가 살을 후벼대도 어쩌지 못 하니 그렇잖은가. 더구나 평소에 해소 기운이 있는 처지라 숨 막힐 듯한 이 상황은 정녕 악마의 소굴에 들어 있는 거나 진배없다. 정신까지 몽롱해질 지경에 다다른다. 바로 옆에서 지껄이는 두 사람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살아야한다는 집념은 ‘초극’의 고통을 강요했다.
 
그렇다고 달리 어떤 방법을 생각해 낼 겨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심신이 지친 탓인지 자꾸만 눈이 감긴다. 단말마가 따로 없구나 싶다. 모든 게 끝장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사휴의(萬事休矣)로 손들며 일어나고 싶은 충동이 몰려온다. 약해지는 마음과 몸을 그러나 다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약해지면 곧장 죽는다는 강박관념이 솟구친다. 지금껏 견뎌온 과정이 아깝다. 아니, 살아서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결의를 다진다. 두 주먹을 뿔끈 틀어쥐었다.
 
그러는 사이 북쪽으로 갔던 두 놈이 어슬렁거리며 대장에게로 돌아온 모양이다. 씩씩거리며 중얼댄다. 도망자를 찾지 못 한 게 제 탓이 아니고 도망자가 너무나 재빨랐다는 투로 변명한다. 놈들은 아버지가 그토록 날렵하지 않을 거라면서 도깨비 같은 사람이 아니냐고 한탄한다. 돌대가리 농사꾼 놈들이기에 놓쳐버린 대어(大魚)에 감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놈들은 힘이 빠졌다. 어슬렁어슬렁 주막으로 물러갔다. 뱁새가 황새를 어찌 따르랴.
 
그제야 아버지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비로소 살아 있다는 기쁨도 맛보는 순간이다. 구부렸던 두 다리를 기지개하듯 뻗어 본다. 시원하기 그지없다. 움츠러졌던 몸이 이제 풀려난다. 어린 애기의 버둥대기 시늉하듯 참았던 피곤을 털어버리기 위해 온몸을 쭉 펴 본다. 팔다리를 마음껏 뻗으며 또다시 심호흡을 한다. 얼마나 기다렸던 기회였나. 흐뭇한 순간이다.
 
정말 고마웠다. 이 보다 더 감사할 일이 있나. 그 고마움 헤아릴 길이 없는 아버지는 눈물을 닦았다. 살아 있다는 걸 새삼 실감했기 때문이다. 평생에 걸쳐 산전수전 다 겪었어도 이토록 극심한 고난은 처음이었던 게다. 그러는 사이 주막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반대쪽으로 갔던 두 놈도 돌아와 저네들끼리 다투기 시작한 게다. 서로가 ‘네탓타령’이라 고성이 터지고 만 것이다. 아버지는 ‘이 때’이다 싶었다고 뒷날 또렷이 회고했다.
 
아버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뛰기 시작했다. 저희끼리 싸움박질을 하고 있으니 다른 겨를이 없을 것으로 믿고 주막과 반대방향으로 내달렸다. 무작정 뛰고 또 뛰었다. 어둠에 눈도 익숙해졌다. 이제 방향감각이 살아났다. 자신이 어려서부터 다녔던 길이 차분하게 기억되었다. 유성천 내뚝으로 달려갔다. 꼬불꼬불한 논두렁길을 힘을 다해 뛰었다. 놈들의 소란이 아버지의 도망길을 열어 준 셈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진정 그랬다.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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