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흘러간 유행가에도 매력이 있다.「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노래가 그 하나이다. 애상어린 감회를 들춰주기 때문에 그렇다. 지나간 세월의 아쉬움이 살아나기에 더욱 그럴 게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그래서 ‘그리운 그 옛날(Good old days)'이라고 동경해 마지않는다.
꽤 오래 전에 미녀 가수 나애심이 ‘슬로우’로 불렀던 이 노래가 요즈음의 정치 감각을 자극한다. 대권에 도전한다는 사람들이 이 노래 말처럼 과거를 들먹거리기 일쑤라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운 그 옛날’이 결코 아닌 모양이다. 추억의 미화가 아니라 정쟁의 독설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자칫 더티 플레이가 될까 걱정된다.
가볍게 ‘폴카’춤을 즐기며 부르는 백년설의「복지 만리」도 아니고 바쁘게 ‘트로트’곡에 맞춰 노래하는 백년설의「애수의 소야곡」이 아니라도 한국인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가요곡의 맛은 ‘한(恨)’ 그 자체이다. 북받치는 한을 주체하기 어려울 때 부르기 좋아 하는 탓이다. 그런데도 한국인에게는 과거라는 개념이 때로는 한을 품은 일종의 ‘독기’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걸핏하면 옛날에 있었던 ‘4.19’가 어떻고 ‘5.16’이 어떻다고 떠든다. 나무라는 말 아니면 씹어대는 말이 분주하게 오락가락한다. 나애심이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가고 이제는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네”라고 흥을 돋우며 과거를 묻지 말라고 하는데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건국초기의 어설펐던 정권으로부터 ‘4.19’는 민주화의 꽃을 가꾸어냈다.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던 정권으로부터 ‘5.16’의 결실은 ‘못살고 힘들었던 세월’을 잘 이겨내는 힘을 갖게 해주었다. 필리핀보다, 아니 북한보다 국민소득이 적어 어지간히도 못살았던 가난을 이겨내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대학졸업자가 독일 탄광부로 자원해 갈 정도로 피폐하고 곤혹스럽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정녕 꽃을 피워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비록 쿠데타라고 해도 ‘필요악’의 구실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콩도 좋은 수확을 얻기 위해서는 ‘근류 박테리아’가 꼭 필요하다. 박테리아는 분명 콩과 공생하며 질소를 공급한다. 프랑스의 ‘보나파르트 쿠데타’도 국가와 국민에게 성공적인 행복을 안겨주었다. ‘5.16’ 역시 그런 사실(史實)임에는 틀림없다. 헝그리복서가 챔피언이 되면 흘렸던 눈물도 땀방울도 고마울 따름이다.
지금 우리는 ‘20-50클럽’에 들어선 경제적 개선장군이다. 그러면서도 쫄병의 고난행렬을 몽땅 잊어버리고 있다. 기름진 음식에다 사치스러운 명품을 데꺽데꺽 사들고 자랑하는 현실을 세계가 부러워하며 우리를 개발귀재로 우러러본다. 우리는 지금 아주 으스대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그 동력을 제공한 과거를 증오의 대상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현재의 잣대로 지지리 못살던 시절에 저지른 일을 미워만 해서 뭣 하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을, 그나마도 못나고 가난했던 때 누더기 입고 구걸하던 일을 되새겨 뭐 그리 흥겹다는 건가. 지난 일은 지난일일 뿐이다. “과거사는 흘려보내라(Let bygones be bygones)”는 명제를 다시금 명심할 필요가 있다. 괜스레 흥분하지 않으면 좋겠다. 부질없이 떠벌리지 않으면 착하다는 소리라도 들을 게 아닌가 싶다.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지혜가 그립다.
덤벙대는 짓은 교양부족이 아니라 자질미달이라는 라벨을 받을 위험이 있다. 부역자 자손이 뭘 한다고 해서 부역 질을 따지지 않는다. 군인의 딸이 뭘 하겠다고 나선다 해서 그 아비의 허물만 나무랄 게 아니다. 형평의 원칙에 맞는지도 궁금하다. 앵두나무 곁가지 같은 존재들이 씨부렁대는 꼴은 그래서 그리 반가운 게 아니다. 더러운 몸도 샤워하면 새 몸이 된다지 않는가. 산뜻한 그 기분에 차라리 밝아지는 앞날만 보고 뛰는 현자가 되자.
윤 기 한(시인, 평론가, 충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