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글씨 쓰기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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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글씨 쓰기의 부활
  • 윤 기 한 (충남대 명예교수 , 전 충남대 대학원장 ,
  • 승인 2018.10.2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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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기 한 (충남대 명예교수 , 전 충남대 대학원장 , 시인 , 평론가 )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영어 자모 (alphabet)의 필기체 쓰기가 부활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 반갑고도 놀라웠다 .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손 글씨 쓰기 소식이기 때문이다 .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미국 동부에 있는 뉴잉글랜드 (New England) 6 개 주 가운데 하나인 코네티컷 (Connecticut)주 댄버리라는 곳에 있는 역사박물관이 최근 필기체 쓰기 여름 캠프 개최를 보도했더니 학부모들과 어린이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 이런 현상은 미국만이 아니고 영국에서도 성행 중이란다 . 환영해 마지않는 행사이다 .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자꾸만 줄어드는 추세에 손 글씨 쓰기가 부활한 소식은 참으로 기특한 일이다 . 그동안 산업화 사회가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어 기계만능주의에 희열을 맛보면서 유토피아 세상을 구가해 왔다 . 글 쓰는 기계인 타자기 (typewriter)의 발명으로 손 글씨 , 즉 펜글씨가 천대를 받았다 . 빠르고 깨끗하게 글씨를 찍어내는 타이프라이터의 위력은 금세 인간의 손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 잉크와 철필이 밀려나면서 학교에서 연필마저 내동댕이쳐지는 불운을 맞았다 . 기계가 사람의 손을 편하게 도와줬다 .

이 위대한 발명품 타자기에 사로잡힌 미국인들은 아주 편리한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행복을 만끽했다 . 그런 행운은 학생이나 성인이나 손 글씨를 마다해서 대학생의 노트북은 벌레가 그려 놓은 궤적처럼 글씨를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 그럴 때 우리는 글씨 재주 좋은 면서기가 엄청난 대접을 받았다 . 모든 문서가 그의 손 글씨로 기록되었으니 문맹이 많았던 시절에 그의 파워는 대단했다 . 그래서 면서기의 달필을 부러워하며 연필 심지가 부러질 만큼 힘들여 글씨공부를 해왔다 . 미국학생들에 비해 우리 학생들의 손 글씨가 훨씬 예쁘고 똑바르고 정갈했다 .

그러다 쾌속 질주하는 기계문명은 드디어 아나로그 (analog)를 뒷전으로 물리치고 디지털세대를 열었다 . 타자기는 물 건너간 고물이 되고 컴퓨터가 득세를 했다 . 내 경우에도 미국 대학에서 공부할 당시에 최신형 전자동 타자기를 구입해 한동안 사용했지만 지금은 무용지물 신세가 되어 서재 귀퉁이에 처박혀 있다 . 그런 타자기의 불행이 행여 손 글씨 쓰기를 재현하는 은혜라도 베풀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컴퓨터의 만능재주에 그냥 허물어져 만사휴의 (萬事休矣 )가 돼버렸으니 그 운명 일러 무삼하리오 . 그런데 갑자기 영미국에서 손 글씨 쓰기 운동이 일어났다니 괴이 (怪異 )타 할꺼나 .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은 어쩌면 귀찮고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기계에 비해 더디고 부정확하고 불충실할 수 있다 . 허나 손을 움직여 글씨 쓰기를 하면 타자기나 컴퓨터를 두드려 쓰는 것 보다 뇌의 활동에 주는 영향이 훨씬 크다 . 치매 예방이나 치료에 손놀림 운동을 권장하는 이유와 같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화 생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이른바 육필 글씨를 외면하기 일쑤이다 . 그러다보니 편지쓰기가 줄어 길거리 우체통을 구경하기 어렵다 . 새해맞이 인사로 보내던 연하장이라는 것을 받아보고 써 본 적이 까마득하다 . 그래 인정까지 메말랐잖은가 .

    

돌이켜 보건데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배우기 시작한 영어공부에 억눌렸던 시간이 매우 지루하고 두려웠던 게 사실이다 . 지금도 우리의 영어교육이 전근대적 방식을 탈피하지 못 하고 있는 실정으로 보이는데 내가 겪은 영어공부는 너무나 무지막지 (無知莫知 )한 것이었다 . 우선 영어독본 (English Reader)이 문어체 일변도이다 싶이 어렵고 재미가 없는 내용이 너무 많았다 . 영작문이라는 괴팍한 교습이 필수였다 . 읽고 뜻을 풀어 익히기도 어려운데 영어로 문장을 써보라는 것이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 천자문 외우기도 전에 과거시험 보라는 식이다 .

거기에 발음기호라는 걸 배워야 한다 . 독본을 읽기도 쉽지 않은데 영어 낱말의 발음을 일러준다는 글자를 따로 배운다 . 독본 글씨와 비슷한 게 있는가 하면 웬 쇠꼬챙이 같은 글자가 섞여 있어 마냥 헷갈린다 . 그나마 우리말 우리 글씨처럼 하나하나 꼬박꼬박 소리를 내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글자는 소리를 내지 않아야하고 또 어떤 건 된소리로 읽어야 하는가 하면 길게 느려 빠지게 소리를 끌어가는 것도 있고 애슨트라는 것도 따져가며 읽어야 하는 것이 있다 . 이러니 영어시간은 애당초 따분한 과목으로 치부하고 마는 학생이 늘어났다 .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게 영어공부였다 . 펜맨십 (penmanship)이란 게 또 성가셨다 . 이게 바로 손 글씨 쓰기 학습이다 . 영어필기체를 쓰고 또 써야했다 . 그래도 이건 그런대로 재미나기도 했다 . 처음에 동그라미를 왼쪽에서부터 시작해 쭉 이어가며 연습한다 . 쪽 고르게 그려나가야 선생님의 알밤을 이마에 맞지 않는다 . 그런 과정을 합격한 다음에야 알파벳을 펜맨십 연습장에서 써보게 된다 . 나는 이 과정을 좋아했다 . 인쇄체의 무미건조한 시각 보다 훨씬 수려하고 얼핏 예술성이 있는 듯해서 그랬다 .아직도 서신왕래가 계속되고 있는 미국 대학 모교의 전 외국인상담실장은 내가 중학교 1 학년 때 열심히 익혔던 영어필기체 (스펜서체 )보다 더 멋스럽고 아담하게 글씨를 써 보낸다 . 편지를 받을 때마다 신기하게 여겨지고 심미적인 감상을 한다 . 아무리 기계가 편의적 혜택을 준다 해도 손 글씨의 매력은 이길 수 없다 . 과거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니스트가 어느 날 갑자기 원고지 대신 컴퓨터로 글을 쓰겠다고 해서 내심 거부감을 가졌었지만 이제 나 자신도 컴퓨터로 이 글을 쓰고 있다 . 인생무상이 아니라 원고지 무상이 된 셈이다 . 누렇게 바랜 원고지 뭉치가 눈을 흘기는 것 같다 .

모든 게 생멸변전 (生滅變轉 )한다는 불가의 법언이 아니라도 간악한 인간의 성정은 뭔가 자꾸만 바뀌는 걸 좋아한다 . 그렇게도 억세게 요란을 떨던 크리스마스 이브가 시들해지고 초코릿 장사꾼들이 떠들어 대던 바렌타인즈 데이가 잊혀져가고 다가올 빼뻬로 데이도 숨넘어갈 정도로 젊은 연인들을 놀려대지만 언제 시들해질지 모른다 . 그렇듯이 컴퓨터의 마력이 언제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 하지만 손으로 글씨를 쓰는 작업은 언제든 쉽고도 간섭 없는 기계나 매한가지일지니 모처럼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손 글씨 편지 한 장 써 보내는 정성을 기우리자 ./윤 기 한 (충남대 명예교수 , 전 충남대 대학원장 , 시인 , 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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