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프라이터(Typewriter)는 19세기의 기계문명이다. 바로 글자를 찍어내는 산업문명의 이기(利器)였다. 종이에다 손으로 잉크를 묻혀서 쓰던 글씨를 기계로 하나하나 글자를 찍는 게 타이프라이터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글자를 찍는 기계라고 ‘라이팅 머신(Writing machine)'으로 불렀다. 1711년에 이 기계를 도입한 영국인 제임스 랜선의 공로 덕분에 영국과 프랑스의 맹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했다.
19세기 초에 여러 유럽인이 비슷한 구상을 가지고 ‘라이팅 머신’에 도전했다. 갖가지 형태가 선보였다. 그 가운데 피아노의 건반과 같은 형태도 등장했다. 대부분의 발명품이 손으로 쓰는 것보다 속도가 느려 신통치 않았다. 1833년 프랑스의 자비에 프로가 특허를 받은 ‘타이프 바’가 크게 발전한 현대식타이프라이터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미국의 슬레스 글리든이 1867년에 만든 것이 ‘타이프라이터’라는 명칭을 최초로 획득했고 그것이 곧 현대식 타이프라이터의 효시이다.
이것을 상품화한 사람이 총과 재봉틀 제작자 미국인 필로 레밍턴이다. 그의 이름을 딴 ‘레밍턴 타이프라이터’가 가장 인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타이프라이터를 ‘타자기(打字機)’라고 호칭했다. 나는 젊었을 적에 이 레밍턴 타이프라이터의 애용자였다. 성능이 다른 제품보다 매우 뛰어나다. 하지만 몸체 무게가 엄청나서 이동하기에 불편할 정도였다. 그 후에 많은 발전을 거듭해 경량화도 이루어지고 전동식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대전의 어느 상업고등학교에 미군부대가 타이프라이터를 지원했다. 인기 만점의 레밍턴 타자기 10 여대가 그냥 창고에 갇혀 있었다. 기계를 다룰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 좋은 물건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는 게 너무나 안쓰러웠다. 교감 선생은 내 요청을 수용해 준 덕분에 레밍턴 타이프라이터는 모처럼 햇빛을 받았다. 직업인 양성이 교시인 학교에 타자교육은 어쩌면 필수과목이어야 한다. 그래서 타자수업시간을 마련하고 과외활동으로 ‘타자반 동아리’도 조직했다. 전국적으로 처음 생긴 ‘타자교육’이었다.
대학생시절 서울 이태원 소재 미군부대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할 때 잠시 익혔던 타이프라이터 사용법을 살려 타자교육을 실행했다. 동시에 보조교재 유인물을 타자기로 찍어냈다. 선명하고 정확한 글자로 만들어진 유인물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등사기로 만든 유인물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철판에다 기름종이를 올려 철필로 박박 긁어서 등사한 과정은 이제 한낱 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학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타이프라이터는 산업분야에서도 각광을 받았다. 세계적인 명물이 된 타이프라이터는 그러나 손 글씨(Hand writing) 쓰는 습관을 짓밟고 말았다.
타이프라이터의 왕국으로 등장한 미국에서 손 글씨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글씨가 난잡한 형태를 벗어나지 못 하고 아예 글자를 손으로 쓰는 경우가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손 글씨 작업은 비록 어설프고 느려도 친근감과 자신감을 갖게 한다. 손의 운동은 뇌의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치매예방에도 손 운동이 필수 과정이다. 그러니 기계가 점령한 인간의 생활방식에 이른바 ‘아날로그 스타일(analog style)' 이 도입되었다. 인성도 이에 따라 기계식 반응을 갖게 되었다. 유추방식이 상승세를 타고 올랐던 것이다.
타이프라이터 전성기는 그래서 인간성 말살의 위기를 초래했다. 휴머니즘의 고갈을 불러와 모든 걸 기계일변도로 몰고 갔다. 인간고유의 정서가 소멸되고 물질의 파워가 득세하는지라 매사가 모노 레일방식(Mono rail system)으로 처리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래도 문명의 이기인 타이프라이터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유아독존’이었다. 그럴 즈음에 인간성회복이 대두하는 한편으로 전자기기가 무한대의 발전을 예고했다. 디지털시대(digital age)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경이로운 변화요 신비로운 발달이다. 만사형통하는 컴퓨터 세상의 출현이다.
윤 기 한(충남대 명예교수, 전 충남대 대학원장, 시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