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李建昌1852-1898)의 고령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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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李建昌1852-1898)의 고령탄-
  • 황대혁 기자
  • 승인 2023.01.22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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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탄>은 이건창이 동사(東史, 이종휘)를 읽다가 樂府 한 편을 청하는 동생에게 지어 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생각을 담은 노래 한편을 선물한 것이다.
제목은 고령부원군 신숙주가 탄식한다(高靈歎)는 의미로, 작가가 역사적 변절자인 고령부원군 신숙주가 죽음에 임박하여 59년 삶을 회한하는 입장에 서서 서술한 장편의 고체시이다.
필자는 20대 후반에 이 시를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시의 함축성과 묘사의 적확성도 훌륭했지만, 우리 문사에 없는 인륜의 보편성에 기초하여 신숙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서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었다. 그 승리의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승리만으로 모든 것이 미화되고 합리화된 역사였다.
칼이란 누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데 우리 역사는 이를 다루지 않는다. 소 잡는 칼이든 요리하는 칼이든 칼을 쥔 자 마음대로였으며 그 칼의 용도에 따른 정당성 여부에 대한 평가는 없던 역사였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이건창은 최고의 문장가이며 시인이라 칭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시란 무엇인가. 시를 言志라고 한다. 즉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양심에 부딪힌 사건을 하나의 거짓 없이 시인의 마음을 토설해내는 것이다. 문이란 무엇인가. 도를 꿰는 도구이다.
시에 양심의 메아리가 없고 문장에 도의 조율이 없다면 하나의 서정적 문사에 불과할 것이니 어디에 쓰일까?
이 한 편의 시에는 양심이 있고 도의 조율이 있으며 인간과 비인간이 있으니, 인물의 현부를 양심과 도리의 관점에서 노래한 것이다.
인간의 양심은 모든 인간이 본디 소유한 칼이다. 그 칼은 불의에 숨죽이기도 하지만 울며 일어서기도 한다. 이건창의 고령탄은 숨죽여 울던 칼이 비로소 일어나 춤을 추라고 한다.
어찌 이에 그치랴. 칼을 쥐고 본분을 다하지 못한 김종서, 황보인, 정분의 무능도 탓하리라. 패륜의 세조와 신숙주의 칼날 아래 떨치지 못한 칼의 노래도 다시 깨워 일어서게 하리라.
칼을 쥔 자는 춤을 추어라. 칼춤을 추어라. 필부필부와 함께 추어라. 다시는 칼바람 앞에 숨죽이며 우는 장삼이사가 없게 하라고 한다.

칼춤(2)
인생이 타고난 본디의 칼은 인륜 강상의 도리를 뒤엎는 명명백백한 불의의 칼춤을 추기도 어려운데 그 대가로 얻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부귀공명을 채 누리지도 못하였는데 59세에 나의 생을 마감해야 한다니 참으로 억울하고 애석하다.

人生會止此 인생이 마침내 이 지경에 그치니
至此亦大難 이 지경에 이름 또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恩封府院君 은혜는 부원군이요.
大匡議政官 대광보국 영의정이라.
子孫數十人 자손 수십 명
一一登朝端 하나같이 벼슬에 올랐네.

賜宅第一區 사택은 제일 요지요.
賜號稱保閑 사호는 보한이라 일컬었네.
前門棨戟樹 대문엔 창 든 호위무사요.
後堂絲竹彈 후당엔 현악기 울렸네.

步履落天上 발걸음 궁궐에 이르고

고주환유학자
고주환유학자

 

咳唾流人間 말씀은 세상에 울렸네.
功德被黔黎 공덕 백성에 미치고
文章耀戎蠻 문장 오랑케까지 빛났네.

一朝嬰疚疾 하루아침 걸린 고질병
御醫齎御藥 어의 약을 가져오고.
承旨與內侍 왕명 받든 승지와 내시
奉敎來几閣 연달아 사택 찾아왔네.

相公疾何如 상공 병환 어떠하시오.
能無甚癘瘧 역병보다 고통이 심하진 않으신지
相公疾何如 상공 병환 어떠하시오.
聖主爲不樂 성주께서 근심하십니다.

相公黙無言 상공 말없이 침묵하고
仰天長歔欷 하늘 우러러 길게 탄식하네.
칼춤(3)
‘새가 장차 죽음에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음에 그 말이 선하다.’는 옛 현인의 말씀이 유독 신숙주만 그렇지 않겠는가?
신숙주 또한 인간이니 어찌 불의에 울리는 내면의 칼이 없겠는가. 다만 눈앞의 탐욕이 울지 못하게 억눌렀으리라.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옴에 내면의 칼이 다시 울리며 자신이 저지른 과거를 돌아보지 않겠는가?
59년의 삶이 잘못되었다. 이제는 돌이키고자 하나 돌아갈 수 없으니 회한의 탄식만 할 수밖에 없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했을까? 타고난 재능, 세종과 같은 성왕의 은총, 훌륭한 친구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던 나는 왜 그들을 저버리고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단 말인가?
한 시대의 삶의 질은 경제적 풍요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지식인의 칼의 향방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훌륭한 친구와 역사에 드문 성군의 아름다운 칼을 버리고 패륜의 칼잡이가 되어 누린 부귀도 겨우 59세라는 짧은 세월에 그쳤으니 어찌 더욱 아프지 않으랴.
이로 삼정승을 비롯하여 사육신과 생육신 등 동시대 아름다운 칼을 꺾어버렸으니,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그 오명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니 이를 어찌할꼬. 민족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일 뿐만 아니라 민중의 가슴에 살아 있는 칼을 울며 숨죽이게 하였으니, 문화풍속에 지은 죄는 더욱 막대하다 하겠다.

人生會止此 인생이 마침내 이 지경에 그치니
五十九年非 59년 삶이 잘못이라.

五十九年事 59년 삶의 여정
歷歷復依依 또렷하다가 또 흐릿하다.
依依復歷歷 흐릿하다가 다시 또렷하다.
相公心自知 상공의 마음 스스로 알리라.

卄二魁司馬 스물둘에 司馬
卄三壯元焉 스물셋에 壯元
三十重試第 서른에 중시 及第
四十踐台事 마흔에 정승에 올랐네.

憶昔三十前 옛일 생각하니 30년 전이라.
際此英陵時 이즈음이 세종대왕 때였지.
英陵大聖人 세종은 위대한 성인
愛才如金玉 재주 사랑 금과 옥 같으셨지.

置我集賢殿 우리를 집현전에 두시고
賜我湖堂讀 나를 호당에서 글 읽게 하셨네.
內廚供盤饌 임금의 수라간 반찬 바치고
內府供筆札 내부에서 지필묵을 공급케 하셨네.

內侍宣召人 내시를 따라 임금 처소에 들어서니
內人宣醞出 나인이 향기로운 술 내왔지.
宣醞四五行 임금이 내리신 네댓 잔 술
御樂奏未闕 성대한 풍악 아직 그치지 않았건만,

娟娟上林花 아리땁구나. 정원의 꽃이여.
艶艶天池月 어여뻐라. 연못 속 하늘 달이여.
小臣醉如泥 술 취한 이 몸 비척거리는데
月墮香泌骨 달이 지도록 그 향기 뼈에 스미었네.

煌煌紫貂裘 휘황찬란한 곤룡포여.
驚顧此何物 놀라 돌아보니, 이 무슨 옷인가?
聖主手自解 임금께서 손수 곤룡포 벗어
覆與小臣醉 술 취한 이 몸 덮어주셨네.

小臣醉不知 술에 취했으니 어이 알리.
小臣死無地 죽을 곳 없으니 어이 하랴.
仁叟好經術 박팽년은 경술을 좋아하고
謹甫多文章 성삼문은 문장 뛰어나고

仲章經濟士 하위지는 경제 밝고
太初英妙郞 유성원은 빼어난 대장부
伯高富才思 이개 재주와 생각 풍부하고
小臣同翶翔 나도 이들과 함께 노닐었네.

翶翔復何爲 함께 노닐다 나는 무엇을 했나.
戒之愼勿忘 경계하고 삼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왕의 은혜도 친구의 우의도 저버린 패륜의 이 몸은 이제 어디로 가나. 이 지경에 이르러 회한의 눈물을 뿌린들 뉘 나를 용납할까.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나의 내면의 칼은 절망으로 갈갈이 찢어질 뿐이다.
칼춤(4)

    

가슴을 조이는 양심의 서늘한 칼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어슴푸레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하신 세종의 모습이 보이고 문종의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칼날같이 나를 질책하는 친구들의 매서운 눈초리도 보인다.

59년 나의 삶이다. 증자께서는 “내 발을 열어보며 내 손을 열어보아라. 詩經에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연못에 임하듯이 하며 살얼음을 밟듯이 하라.’ 하니, 지금 이후에야 내가 면함을 알겠노라. 제자들아!” 임종에 제자를 불러 손과 발조차도 훼손함이 없이 죽게 되어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 하셨거늘, 나는 무엇을 했나.

나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위로는 임금을 기만하였고 친구의 양심의 칼을 죽이고 뭇 백성의 칼을 울며 숨죽이게 하였으니, 어느 곳에도 빌 곳이 없다.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는 다가오고, 이제 처음으로 나의 양심의 칼이 내면에서 아우성치니, 인생, 59년 인생이 이 지경에 이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人生會止此 인생이 마침내 이 지경에 그치니
誰意大不然 누군들 크게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英陵旣棄臣 세종께선 이미 돌아가셨고
顯陵又賓天 문종 또한 돌아가셨네.
英陵好孫子 세종께서는 손주를 사랑하시어
聖人曾有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千秋萬歲後 천추만세 후
望卿念此孫 바라건대 경은 이 손주를 마음에 간직하라.
此孫在何處 이 손주는 어느 곳에 계시는고
此事不可論 이 일 더 논하지 마라.

淸冷浦水淸 청냉포 물 맑기만 하고
子規啼夜月 소쩍새만 달밤에 운다.
不聞子規聲 소쩍새 울음 들리지 않고
但見子規血 단지 소쩍새 붉은 피만 보이네.

仁叟好經術 박팽년은 경술 좋아하고
謹甫多文章 성삼문은 문장 뛰어나고
仲章經濟士 하위지는 경제 밝고
太初英妙郞 유성원은 빼어난 대장부

伯高富才思 이개 재주와 생각 풍부하고
此輩盡淪亡 이들 다 죽었다네.
此輩盡淪亡 이들 다 죽었는데
小臣獨翶翔 나만 홀로 살았네.

翶翔數十年 수십 년 영달
富貴未遽央 부귀공명 절반도 누리지 못했는데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는데 멀리 들리던 소쩍새 울음도 그치고 온통 정적만 흐르는데 어슴푸레 어린 단종께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네.

칼춤(5)

백성은 얻고 잃음이 정치의 표준이며 역사의 표준이며 인간의 표준이며 칼의 표준이다. 우리 역사에는 그 표준이 없었다. 이건창은 고령부원군 신죽주의 탄식을 통해 그 표준을 노래하며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이 있지 말라 하였다.

맹자께서는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음이니, 그 백성을 잃음은 그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얻음이 도가 있으니, 그 백성을 얻으면 이에 천하를 얻으리라. 그 백성을 얻음이 도가 있으니, 그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으리라. 그의 마음을 얻음이 도가 있으니, 하고자 하는 것을 함께 취하고 싫어하는 것을, 베풀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우리 역사에서 ‘난(亂)’이라 명명했던 모든 것이 바로 억눌려서 울던 백성의 칼이 일어나 추던 춤이었다. 그 춤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일제의 침략 앞에 처참히 부서지는 아픔도 없었으리라.

고령탄을 노래하며 인간 본연의 칼춤을 춘 이건창의 문사조차 소위 광복이라 명명한 이후에도 대한민국 어느 교육과정에서도 가르치지 않았으니, 과연 대한민국의 지식인과 지도층은 어떠한 정체성을 지녔을까? 사건의 시비도 인물의 현부도 판단할 표준이 없는 나라에서 위정자와 지도자와 지식인은 무엇을 했나. 어찌 오늘의 양극화와 저출산과 국토의 기형적 발전과 청소년의 절망이 하루아침에 생겼겠는가.

조선 500년에 최연소(13세) 과거급제자인 이건창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가슴에 저미는 칼춤을 그대로 추었다. 그 후 많은 칼춤이 있었다. 집단적인 칼춤도 있었고, 장터에서도 광장에서도 숨어서도 칼춤을 추었다. 다시는 신숙주와 같이 탄식하는 사람이 있지 말라 한 고령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울며 숨죽이다가 폭발하는 칼의 춤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표준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륜도덕이 첫 번째요, 다음이 의·식·주이다. 그러나 그 실천은 의식주가 먼저요, 인륜도덕이 그다음이다. 그래서 백성의 하늘은 식(衣食住)이라 하는 것이다. 위정자와 지식인과 지도자는 인륜도덕이 첫째요, 그들의 사명이 백성을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하는 데 있음은 자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 일제, 현대사에도 우리의 위정자와 지도자와 지식인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이건창의 고령탄은 울며 숨죽이지 말고 일어나 칼춤을 추라고 한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패러다임 외치라고 한다.

人生會止此 人生이 마침내 이 지경에 그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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