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무례지국으로 추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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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무례지국으로 추락하다
  • 윤 기 한(충남대 명예교수, 전 충남대 대학원장, 시인
  • 승인 2018.09.0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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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기 한(충남대 명예교수, 전 충남대 대학원장, 시인, 평론가)

예로부터 일러오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 사라졌다. 이제 동방무례지국(東方無禮之國)으로 둔갑했다. 중원(中原=중국)의 황제도 자기 나라 동쪽에 자리한 조선을 부러워했다. 예의 바른 반도국가의 예법을 깎듯이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자기들이 만든 유교예법을 가장 깨끗하고 멋지게 지켜나가는 조선을 가리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이른바 삼강오륜만 해도 저들이 창작한 예법인데 이걸 제대로 익혀서 곧잘 실행하는 우리 조상들의 품격에 감격했던 것이다.

 

우리는 좋은 나라 땅을 가지고 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우리나라는 그래서 곧잘 금수강산이라고 자화자찬한다. 지세(地勢)만 그리 좋은 게 아니다. 춘하추동 사시사철의 절기가 살맛나게 해준다. 조습(燥濕)이나 청우(晴雨) 그리고 한서(寒暑)가 온건한 아열대 기후의 혜택을 받고 있다. 맹렬하기 그지없는 토네이도의 회오리바람이 없고 남북극지대의 거대한 어름덩이 빙산도 없다. 이렇게 좋은 자연환경에 따라 우리나라 사람은 본시 유순하고 착하다. 그러기에 일찍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대접을 받았던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인도의 시성(詩聖) 타골(Rabindranath Tagore)이 크게 격려해주었다.

 

그러하건만 지금껏 누려온 ‘동방예의지국’ 영예가 내락으로 추락하는 지경에 이른 듯하다. 세월이 좋아져서 그렇다고들 하는데 남녀평등을 비롯해 인권만능 풍조가 쓰나미(津波) 몰려오듯 거세게 불어온다. 그 바람에 유교도덕의 기본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부서지고 말았다. 고리타분하다는 3강이란 게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그리고 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 임금과 신하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가 있다는 기본적인 사회 윤리가 존중되어 왔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낙조처럼 폐기처분을 당했다. 어쩌면 현대인의 의식세계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아이템이 돼버린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현대가 수렴하기 힘든 것은 자연도태가 필연지사이다. 삼강이야 강물에 띄워버려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오륜은 지켜볼만한 가치가 있을 법도하다. 얼핏 삼강오륜은 봉건시대의 덕목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어쩌면 현대적인 해석을 통해 활용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 군신유의(君臣有義)는 임금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의리(충성)로 대치할 경우 타당성이 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은 부모와 자식이 친화력을 갖는 것이고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어른과 아이에게 차례가 있어야 하고 붕우유신(朋友有信)은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얼마나 멋지고 신나는 생활방식인가.

 

어쩌면 삼강오륜의 벼리는 오늘날 더욱 요망되는 덕목이다. 부득불 따지자면 부부유별의 경우 남녀의 차별이 아니라 남녀 역할의 구별에 의해 각자의 직능 완수를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유유서도 경로사상의 실천적 의미로 수용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노인의 소외화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었다. 그러기에 점차 삼강오륜과 같은 전통적 윤리 질서를 봉건적 잔재라고 쉽게 무시해 버리지 않고 현대적 해석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다. 무너져가는 ‘동방예의지국’ 간판을 살려야 한다는 지성인들의 호소가 들려온다,

 

우리의 아름다운 윤리도덕이 힘없이 쓰러지는 광경을 너무나 자주 보게 되는 현실이 민망하고 서글프다. 오늘 아침에 지하철역에서 맞닥뜨린 사건이 바로 ‘동방무례지국’의 표본이다. 정차한 차량 출입구에서 당한 치욕이다. 하차하는 승객들이 내리고 난 다음에 조용히 승차하려는 찰나에 벌어진 ‘밀치기’는 ‘힘 센 놈이 먼저다’를 절규하게 만들었다. 건장한 20대 청년이 내 앞을 가로질러 덥석 덤벼들었다. 나는 어이없이 뒤로 밀려났다. 차에 오르니 앉을 자리는 그 젊은 ‘넘’이 차지했다. 이 얼마나 고약한 횡포인가. 미국의 못난이 ‘니그로(흑인이 가장 혐오하는 단어)’도 그러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유 퍼스트’, 아니면 ‘애프터 유’라면서 양보의 미덕을 보이는 태도는 얼마나 갸륵한가.

    

 

그런 상황에서 지성과 양심을 존중하는 사람은 언제나 손해만 보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낭패를 당하거나 모욕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형 건물 출입구의 중후한 플러시 도어(flush door)를 힘 드려 열면 새파란 아가씨가 뭣이 그리도 바쁜지 제 먼저 훌쩍 앞질러 들어간다. 야 이거야말로 정말 얌채족의 얄미운 새치기가 아닌가. 예쁘다고 봐주기도 싫다. 차라리 내 발이 앞으로 먼저 나가 새치기 미녀가 나뒹굴면 호탕한 웃음이라도 터지려나. 괴팍한 상상력의 파장이 길어지누나. 프러시 도어는 앞뒤로 밀려 여닫힌다. 밀고 들어가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놓아버리면 자칫 앞 사람을 바짝 따라가다가 이마나 코가 깨질 수 있다. 뒷사람을 배려하는 아량이 전무하다싶은 한국인을 뒤따라가면 큰일 날시고.

 

이러니 그 알량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레이블(label)마저 ‘상처 입은 영광’이 되고 말 것인가 참으로 궁금하다. 아니 이미 추락해 버린 게 아닌가. 얼마 전 대학병원 6인용 입원실에서 목격한 참상은 가히 ‘동방무례지국’의 표본이었다. 70대 후반의 노모는 간병인도 없이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는 처지였다. 옆자리 환자의 간병인이 가끔 도와주는데 종일 한 마디 말도 뻥긋하지 앉는 노파이다. 갑자기 40대 젊은 부부가 찾아들었다. 뭔가 몇 마디 말을 나누고는 노인환자로부터 은행통장과 도장을 건네받았다. 금세 작별인사도 없이 훌쩍 나가버렸다. 한방의 환자와 간병인들이 물어봤다, 아들과 며느리란다. 돈을 채트려간 것이다. 불효가 예 아닌가.

 

또 하나 목격한 비극적 단막극도 ‘무례’를 넘어 ‘무참’의 극치였다. 용문동 네거리 근처 홈프러스 익스프레스라는 작은 마트에서 상연된 ‘동방무례지국’의 교범(敎範)이 되는 행패였다. 이 마트의 입구와 출구가 별도로 설치되어있다. 어느 80대 노인이 입구에서 자동문이 잘 열리지 않아 문고리를 잡고 살짝 흔든다. 안쪽에 있던 20대 젊은이가 문을 열어 제치면서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냥 들어와요 체!” 노인이 들어서면서 “자동문이라면서 안 열렸잖소.” 노인의 말이 떨러지기가 무섭게 젊은이의 대꾸가 요란하다. “X발, 그러니까 열어 줬잖아” 욕지거리가 앞선다. 노신사의 심사가 틀어진 모양이다. “X발이 뭐야!” 요즘 말로 아무리 ‘폐기처분’ 직전 고령자이지만 어엿한 고객의 질타는 너무나 당연한 게 아닌가.

 

이 시비가 점입가경이었다. 젊은 ‘넘’이 이에 질세라 “웬 잔소리 해대는 거야”라고 노인고객에게 되레 핀잔을 해댄다. “야 이 사람아 무슨 잔소리냐고?” 그러자 젊은 점원이 “그럼 밖으로 나와 X발!” 아래위로 눈을 부라리며 노인을 욱박지른다. 노신사 고객의 화가 치솟는다. “그래 나가자 당장” 노인이지만 우렁찬 음성과 건장한 체구는 젊은 애를 덥치고도 남을 만 하다. 매장 안 고객들의 시선이 쏠린다. 젊은 짐꾼이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노신사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와 어서. 밖으로 나가자. 어쩔래?” 5분짜리 드라마는 여기에서 막을 내렸다. 이 치욕과 모욕과 욕설이 뒤범벅된 단막참극은 곧 ‘무례지국’의 교과서가 아닌가. 장유유서는 고사하고 무인격, 몰상식의 샐러드는 ‘고객은 왕’이라는 상도의도 파괴한 ‘불례(不禮)’의 망발이 아닐손가. 그러니 오호(嗚呼)‘라 ‘동방예의지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천상으로 나라간 게 아니다. 지옥으로 곤두박질친 게다. ‘동방무례지국’의 딱지가 단단하게 붙어버린 게 아닌가.

 

윤 기 한(충남대 명예교수, 전 충남대 대학원장,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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